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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최미경_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한불전공 교수

프랑스 사회를 규정짓는 많은 표현 중에 우리에게 친근한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가 있다. 로베르(Robert) 사전은 ‘나와 다른 사고와 행동 방식을 수용하는 자세, 의견이 다른 타자의 자유를 존중한 자세’라고 정의한다. 라틴어 tolerare[견뎌내다]를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는 나의 언어, 문화, 종교, 이념을 존중받기 위해서는 타자의 것도 권리가 있음을 상정하는 다원주의적 자세이다. 다문화사회로 구성된 프랑스에서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종교, 이념을 존중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똘레랑스에 대한 가장 적절하며 아름다운 정의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과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불관용의 최악의 사례인 전통적 기독교와 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살상을 경험한 유럽에, 계몽주의는 인본주의의 바탕에 합리적 사고의 존중과 탈종교적 사고를 발전시키게 된다. 볼테르는 인간존재의 자주적 사고, 합리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사상적 투쟁을 한, 대표적인 계몽철학자이다. 특히 종교적인 광기를 평생 비난해 왔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타당한 말이라면 상대가 그 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자세라고 여겨진다.

드레퓌스 사건이 미친 관용의 자세
계몽 시기를 거친 유럽에 19세기 말이 되면 반유대 정서가 팽배해지고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겪게 된다. 1870년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획당하고 알자스와 로렌지역을 잃은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베르사이유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는 굴욕을 당하고 종전한다. 이후 프랑스는 군국주의, 애국주의가 팽배해진다. 알자스의 유대인 출신인 프랑스의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비밀자료를 독일제국에 넘기는 간첩 혐의를 했다는 혐의로 추방형을 받게 된다. 1898년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비합리적 편견에 경종을 울리며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깨우게 된다. 특정 인종에 대한 불관용이 불러온 편파적 판단이 드레퓌스의 인권과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고, 특히 반유대적 정서로 인한 대중적 합의로 드레퓌스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파와 반 드레퓌스파로 분열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격한 투쟁이 진행되었고, 이 사건은 프랑스 내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대표적인 인권유린과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남게 된다. 처음에 드레퓌스를 단죄하는 의견이 다수였던 사회에 에밀 졸라의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진보, 공화파들의 노력으로 드레퓌스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끌어냈다.

프랑스가 10여 년 겪은 이 사회적 분란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잘 묘사가 되어있다. 프루스트는 졸라가 오로르(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진실을 요구하는 양심적인 작가, 지식인의 참여를 선언할 때 동참하고 서명하였다. 총 256회에 걸쳐 드레퓌스의 이름이 소설에 등장할 정도로 프루스트에게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자세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잃어버린 시간”의 화자는 주요 인물의 언행을 통해 그가 드레퓌스파인지 반 드레퓌스파인지 간접적으로 묘사를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인간의 생래적인 요소인 종족, 피부, 언어, 신체적 조건은 물론 종교, 문화, 이념적 사고의 차이로 배타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관용의 자세를 프랑스 사회에 굳건하게 심었다.

관용의 성숙한 발전
그런데 관용의 이면은 참을 수 없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상정하기도 한다.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잔인한 ‘불관용’의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마도 종교전쟁과 더불어 2차대전 시 독일과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과거청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군과 협력한 장성, 경찰, 작가들에 대한 재판과 사형이 집행되었고, 독일군과 살았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머리를 깎은 후 행진하게 하는 등 잔혹할 정도의 청산이 진행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을 고발하거나, 노골적으로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체포와 처벌은 반인륜 범죄로 공소시효의 적용을 받지 않아, 2차대전이 끝난 수십 년 후에도 지속되었다. 로베르 브라지약(Robert Brasillach) 같은 시인은 독일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바로 처형되었다. “밤 끝으로의 여행”을 쓴 대작가 셀린은 노골적인 유대인 비난자로 독일군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독일군 항복 시에 독일로 같이 떠나 형을 면하였다.

반면 모리악, 까뮈, 말로 등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작가들은 독일군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작가들에 대해 가차 없는 처벌을 지지했다. 이렇게 참을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한 프랑스 사회는 대신 전후의 독일과의 화해 과정에서 놀라운 관용을 발휘한다. 드골 대통령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의 학교에서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을 만나며,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 젊은이들을 만나 프랑스어로 과거를 사과하고 미래를 함께 바라보자고 설득한다. 이런 양국의 반성과 용서의 노력은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유대인 학살자 기념비 앞에 털썩 무릎을 꿇는 사진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역대 독일 지도자들은 일관적으로 처절한 반성의 노력을 하였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콜 총리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유럽연합을 세운다.

이런 역사적 교훈 속에 최근 있었던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장면은 2015년 11월 여러 차례의 테러 공격 직후 올랑드 대통령이 이슬람주의자 테러범과 이슬람 신도인 시민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였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올림픽 스타디움 테러가 일어난 날 국제행사 통역을 위해서 출장을 떠난 나는 당시 파리의 두려운 상황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그때 다양한 문화행사를 취소하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라는 주최 측의 이야기를 들었다. 범죄자와 일반 시민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의식, 저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인본주의 전통을 갖은 진정한 강대국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자세야말로 플뢰르 펠르렝, 벵상 플라세, 세드릭 오 등의 한국 출신 장관을 임명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프랑스 사회였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하는 언사,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옆에서의 먹방 등의 비인간적인 행동들은 단죄되지 않았을까?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

프랑스는 1882년 3월 28일 쥘 페리(Jules Ferry) 법으로 3세부터 13세까지 무상 의무교육이 결정되었고 이후 학령이 연장되어 만 16세까지 무상으로 제공이 되며, 의무교육, 무상교육, 정치, 사회적 중립성과 탈 종교성이 공화국 교육의 주요 원칙이 되었다. 이런 교육의 원칙이야말로 관용을 학습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에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종교 편향의 오명을 쓰고 공연이 금지되거나, 이슬람교 사원 건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구워대는 행위는 볼테르의 관용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양심과 합리적인 사고가 아닌 독단과 맹신을 추종하는 파시즘적 행위가 자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한국 사회에서 종종 목격한다. 군사독재 이후에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회복하는 과정의 혼란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그 어떤 사회에서도 민주주의와 관용이 그저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교육의 현장에서 또, 끊임없는 사회적 성찰을 통해 지키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