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분단된 나라의 표준어는 어떻게 할까

강인욱_경희대 사학과 교수

1989년 명동, 그리고 2004년 요령성의 ‘국민당 사투리’

나는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겠다는 꿈을 품고 1989년 고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전공의 첫걸음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과제는 언어였다. 만주 지역의 고대 문화,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겠다는 포부를 품었으니, 중국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제2 외국어로 불어를 택했던 나에게 춤을 추는 듯한 중국어의 성조는 무척이나 낯설고 고달픈 벽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냉전의 끝자락이었으니 강단에 선 교수님조차 “나도 사실 발음엔 영 자신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으실 만큼 대륙과의 교류는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니 중국어를 배우려면 길이 하나뿐이었다. 당시 중국어 학습의 메카는 명동의 중국 대사관 인근이었다. 당시 명동에는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학원과 서점, 식당들이 즐비했다.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다녔던 학원의 선생님들은 모두 대만 또는 홍콩 출신이었고, 자연스레 나의 중국어는 번체자(繁體字)와 대만의 ‘국어(國語)’에 맞춰졌다. 그렇게 익힌 중국어로 더빙된 홍콩영화에서 유덕화와 장국영의 대사를 어렴풋이 알아듣는 것에 만족하며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석사 졸업 이후 박사를 러시아로 정했기에 실제로 대륙의 땅을 밟고 현지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4년의 일이다. 고조선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요령성(遼寧省) 일대를 누비던 시기였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 근처 꼬치집에서 서툰 중국어로 말을 건넸을 때, 심양 사람들은 내 말을 막힘없이 알아들었다. 15년 전의 배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좀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예외 없이 상대방은 실소를 터뜨렸다. 외국인이 중국어를 하는 게 신기해서 그런가 싶어 이유를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당신 말투, 꼭 국민당 사투리 같아요.”

내가 배운 것은 대만의 억양과 어휘였다. 대륙의 ‘보통화(普通話)’와는 성조의 강약도, 자주 쓰는 단어도 미묘하게 달랐다. 아마 내 말투는 대륙의 매체에서 희화화되던 과거 국민당 관료들의 느릿느릿하며 부드러운 성조의 딱딱한 말투를 연상시켰던 모양이다. 물론, 억양이 강해도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가는 도시마다 박물관장들은 친근하게 느끼셨는지, 여러 유물을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덕에 고고학자로서는 득을 보았으나, 언어가 체제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남북의 언어, 닮은꼴 속에 숨은 가시

이러한 언어적 이질화는 비단 중국과 대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에겐 더 절실한 남북한의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는 대중매체에서 강한 억양의 평양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정작 북한 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의 말투는 전혀 그런 매체와 다르고 듣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1970~80년대 서울의 어투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표준어로만 말하면 남북이 그리 다르지 않은 이유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있다. 민족이 하나였던 시절에 공들여 세운 언어의 설계도가 남북한 언어의 근간을 지금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래어의 수용 방식은 극명하게 갈렸다. 우리가 미국식 영어의 영향을 받아 ‘탱크’라 부를 때, 북한은 러시아어에 기반해 ‘땅크’라 부르고 ‘트랙터’는 ‘뜨락또르’라 부르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지엽적인 차이일 뿐 문법과 통사 구조라는 줄기는 여전히 같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독과 서독의 언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분단 40년을 겪었던 독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독의 ‘슈퍼마켓(Supermarkt)’과 동독의 ‘카우프할레(Kaufhalle)’처럼 단어는 달랐어도, 의사소통 자체엔 큰 장벽이 없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통일 이후다. 말이 통하자, 오히려 그 말의 결로 서로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독일 사회는 한동안 억양과 어휘만으로 상대가 어느 쪽 출신인지를 귀신같이 가려냈고, ‘동독 놈(Ossi)’, ‘서독 놈(Wessi)’이라는 낙인은 벽이 허물어진 뒤에도 오래 살아남았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자, 비로소 마음의 벽이 그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깨어진 토기 조각을 붙이듯…

2000년대 초반, 남북한의 관계가 좋을 때 ‘겨레말큰사전’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댄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 작업은 완전한 마무리는 이루지 못했다. 흩어진 어휘를 모으고 표준을 세우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달라져 버린 단어들 하나하나를 두고 누구의 원칙을 표준어로 세우냐는 논의는 자칫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단어를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기술적인 결론이 아니다. 2004년 심양의 꼬치집에서 내가 느꼈던 당혹감처럼, 문제는 서로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그러한 다른 억양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인 것 같다. 대만식 억양을 ‘국민당 사투리’라며 희화화하듯, 북한의 말투를 촌스럽다고 치부하거나 남한의 외래어 범람을 국적 불명이라 비난하는 것은 통합이 아닌 소외를 낳을 뿐이다.

고고학 발굴을 하다 보면 금이 간 토기를 자주 만난다. 물론, 깨진 토기의 흔적을 완벽히 없애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서 고고학계나 박물관 전시에서는 그냥 그 이어 붙인 흔적을 보여주면서 전시한다. 한때 깨졌지만 이제는 다시 붙였고, 그 붙여진 흔적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언어도 그렇지 않을까. 남과 북이 서로의 말에서 낯선 어휘나 억양을 마주칠 때, 그것을 틀린 것으로 치부하거나 하나의 말로 통일하기보다는 그러한 균열 자체를 우리가 함께 살아온 시간의 증거로 포용했으면 한다. 진정한 언어의 통일은 서로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억양과 말투를 그가 살아온 삶의 무늬로 인정해 주는 다양성일 것 같다. ‘표준’이라는 자로 상대를 재단하기 전에, 서로의 말을 오롯이 들어줄 수 있는 귀를 먼저 갖추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주할 통일 시대의 가장 중요한 언어 규범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