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벗, 태국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기
박경은_한국외대 태국어과 교수
찬 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지는 11월이 되면, 한국에서 약 3,500킬로미터 떨어진 태국에서는 일 년 중 가장 큰 두 개의 축제 중 하나인 ‘러이끄라통(Loy Krathong)’ 축제가 열린다. ‘러이’는 동사로 ‘띄우다’라는 뜻이고, ‘끄라통’은 잎 등을 엮어 연꽃 모양으로 만든 작은 배를 지칭하는 말로, ‘작은 배를 띄운다’라는 의미이다. 태국 전통 음력의 십이월 보름 저녁에 열리는 ‘러이끄라통’ 축제는 양력으로 하면 매년 조금씩 날짜가 달라지는데 주로 11월로, 올해는 11월 27일이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중심에 위치한 나라이다. 열대 기후로 크게는 건기와 우기로 양분할 수 있는데 보통 5월 말에서 11월 정도까지 지속되는 우기는 경작과 수확을 하는 시기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태국에서 벼농사의 필수적인 물은 고마운 자원으로 특별하게 여겨진다. 러이끄라통은 물이 풍부한 음력 12월 보름에 개최되는 풍요와 자성의 축제이다.
강둑에 물이 만조가 되는 보름날 밤에 태국 사람들이 물가로 모여든다. 바나나잎 등을 엮어 정성스레 만든 연꽃 모양의 작은 배 ‘끄라통’에는 소망을 담은 향과 초, 액땜을 위한 신체 일부(머리카락, 손·발톱 등)와 동전 등이 담겨 있다. 초에 불을 붙이고 한 해의 액운을 떨궈 버리고 새해의 소망을 담아 조심히 어두운 강물에 띄워 보내며 기도를 올린다.
วันเพ็ญเดือนสิบสอง น้ํา ก็นองเต็มต็ตลิ่ง
십이월 보름날 물은 둑방 가득 찰랑이고
เราทั้งทั้หลายชายหญิงญิ สนุกกันจริงวันลอยกระทง
처녀 총각 모두들 즐거워라 러이끄라통의 날
ลอย ลอยกระทง ลอย ลอยกระทง
끄라통을 띄우세 끄라통을 띄우세
ลอยกระทงกันแล้ว ขอเชิญน้องแก้วออกมารํา วง
끄라통을 띄우고선 사랑하는 그이에게 춤을 청하자
รํา วงวันลอยกระทง รํา วงวันลอยกระทง
러이끄라통날의 윤무 러이끄라통날의 윤무
บุญจะส่งให้เราสุขใจ บุญจะส่งให้เราสุขใจ
공덕이 우리를 행복케 하리 공덕이 우리를 행복케 하리
(‘รํา วงวันลอยกระทง(러이끄라통날의 윤무)’ 노래 가사)
한 해 동안 풍요를 선사한 물에 대한 감사와 함께 물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더럽힌 과오를 강의 여신에게 사죄하는 상징성을 지닌 이 의식은, 한해를 물로 정화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년 행사이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이기도 하다. 전통 사회에서 공개적인 교제의 기회가 부족하던 청춘 남녀들은 해가 진 축제의 밤, 부끄러움을 어둠에 감추고 둥글게 모여서 윤무를 추며 서로를 탐색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태국은 불교도가 95%가량을 차지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 면에서 노래 가사의 마지막 구절에 나온 ‘공덕’이라는 단어는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러이끄라통은 불교와 직접 연관이 있는 풍습은 아니다. 태국에서 러이끄라통 축제의 기원은 13세기 중반 수코타이 시대로 여겨지는데, 궁녀 놉파맛이 연꽃 모양의 끄라통을 처음 만들어 띄운 인물로 전해지며 오늘날에도 러이끄라통 축제에서는 놉파맛 미인 선발대회가 열리곤 한다. 우리나라의 미스춘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러이끄라통은 인도에서 기원한 축제로, 석가탄신일(Vesak)이나 만불절, 초전법륜일, 우안거 등과 같은 불교 명절과는 다른 민간 풍속이다.
러이끄라통과 함께 태국 민족 최대의 명절로 꼽히는 송끄란(Songkran)도 비슷하다. 송끄란은 태국식 설날로, 매년 4월 13일에서 15일,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이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 관광객들을 태국으로 결집하는 물 축제(Water Festival)로 더 잘 알려졌지만, 사실 보통 가정의 송끄란은 아침에 불상에 축수를 뿌리며 복을 빌고 탁발 보시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 집안 어른들께 축수를 뿌리며 새해 덕담을 듣고 방생하며 공덕을 쌓는 불교적 활동을 주로 한다. 하지만 송끄란 역시도 불교와 직접 관련은 없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윈난성 등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는 이 새해맞이 풍습은 아주 오래전에 인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국은 예로부터 다문화사회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동남아시아 지역은 국경은 비교적 최근에 정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그저 비슷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지역이었다. 천혜의 자연 자원을 바탕으로 나누고 도우며 유지되어 온 지역민의 삶에서 이민족의 문화는 흥미로운 것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레 토착 민족의 그것과 융합되어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재탄생해 계승된다.
한류도 마찬가지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한류의 최대 향유국 중 하나이며 주변국으로 전파하는 중간 전달자의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 학습자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의 문화는 콘텐츠와 케이팝은 물론이고 음식, 패션, 뷰티에 이르기까지 태국인들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 들어있다. 한국과 태국 간의 인적 교류는 코로나 이전의 230만 명(연간) 수준을 곧 회복할 기세이다.
한국전쟁 당시 아시아 최초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함께 싸운 태국은 우리에게는 혈맹이자 전략적 파트너이다. 그런 태국과 관련해 최근 들리는 소식들은 안타깝다. 대마초 합법화와 마약 밀반입 문제, 방콕 중심지 대형 쇼핑몰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 정치적 혼란과 반정부 시위. 이런 소식들보다도 더 씁쓸한 것은 X 등의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던 #แบนเที่ยวเกาหลี, 즉 ‘한국 여행 보이콧’ 해시태그 물결이었다. 코로나 이후 봇물 터지듯 증가한 태국인 관광객 중 한국 입국심사에서 이유 없이 불허를 받아 여행 일정이 모두 망가졌다는 인플루언서들의 증언이 일파만파 퍼지며, 이런 취급을 받느니 한국 여행을 가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태국인 중 78%가량인 약 15만 7천 명(2023년 9월 기준)이 속칭 ‘ผีน้อย(작은 유령)’라 불리는 불법체류자로, 전체 외국인 불법체류자 중 태국인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 이전부터 심화한 문제로, 양국 간 사증 면제를 이용해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하여 근로자로 불법 체류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입국 단계에서부터 까다로운 심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순수하게 관광을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어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태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많은 태국인은 이것이 태국인을 무시하는 한국인의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까지도 하고 있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양국의 외교 라인은 서둘러 협의하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나섰다. 2023년은 한국과 태국이 공식 수교 관계 65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한국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태국과 세계적인 관광대국 태국을 사랑하는 한국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이해와 공감의 토대 위에서 아름다운 소통의 꽃을 피워가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