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가 ‘K’가 아니라 ‘C’이던 시절
윤혜준_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알파벳 글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서슴없이 ‘k’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K팝’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은 자부심을 느낀다. 실제로 ‘K팝’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 이들도 일부 한국 대중가수들이 미국 등 외국에서 인기를 누린다는 소식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아울러 ‘K드라마’를 즐기는 세계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최근에는 여기에 가세해서 ‘K푸드’에 세계인이 열광한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k’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철자가 되기 한참 전, 옛날 옛적에는 한국의 이름을 ‘c’가 이끌었다. 런던에서 1708년에 출간된 『한 튀르키예 첩자가 쓴 편지 여덟 권』이라는 ‘팩트’를 사칭한 그러나 어느 정도 ‘팩트’에 근거한 ‘허구’가 있다. 이 책에서는 중국 만주족(Tartars)이 제국 전체를 정복한 후 베이징(Pekin)에서 황제 대관식을 개최했고, 이후
“군대를 끌고 코리아(Corea)로 진군하였는데(이 왕국은 아시다시피 중국과 국경을 대고 있지요) 그 나라의 왕은 굴복했고, 승승장구한 황제의 봉토로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겠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병자호란을 언급한 이 대목에서 ‘Corea’는 ‘K’가 아니라 ‘C’로 시작한다. 이 글자로 시작한 말은 중국에 붙어 있고 중국에 굴복하므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한 나약한 왕국을 일컫는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1726년에 익명으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는 위의 책보다는 훨씬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소설 제3부에서 주인공 걸리버는 일본에도 잠시 들른다. 이 작품의 18세기 판본에는 부마다 걸리버가 실제로 가본 곳이 어디인지를 그려주는 지도가 앞에 첨부되어 있었다. 제3부 지도에는 일본 서쪽에 ‘코리아 해(Sea of Corea)’가 표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동해가 ‘일본해(Sea of Japan)’로 불리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점이 한국인들로서는 매우 반가울 법하다. 다만 코리아의 철자가 ‘K’가 아니라 ‘c’라는 사실에 다소 비위가 상할 수는 있다.
『걸리버 여행기』 1726년 2쇄 판본 표지 / 『걸리버 여행기』 제3부 지도에 나온 ‘코리아 해’ 표
대영제국 전성기 19세기 말까지도 영어에서 ‘코리아’를 표기할 때는 ‘Corea’를 주로 사용했다. 이 시기에 출간된 『바다의 무법자들, 또는 선원 노상강도』(The Brigands of the Sea: or, The Sailor Highwayman)라는 대중 모험 소설에서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맞아, 맞아요. 난 무슨 지어낸 이야기는 안 하지,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성경 말씀만큼 진심이라고. 우리가 코리아 해안, 열도라고 부르는 곳에 있었을 때 말인데요, 그쪽이 어딘지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
“지도에서 보긴 했지, 거기 가보진 못했지만.”
출판된 연도는 1885년이다. ‘코리아’에서 낡은 왕국의 개혁을 급격히 추진하고자 일부 지식인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지 1년 후이다. 그 후로 약 10년 후에 나온 『소년들을 위한 만화 단편소설』이라는 영국 청소년 잡지의 1894년 9월 8일호는 「코리아의 잭 또는 신비의 3인」의 연재를 시작했다. 주인공 ‘잭’은 거의 평생을 ‘코리아’에서 보낸 영국 청년이기에 ‘코리아의 잭(Jack of Corea)’으로 불린다.
「코리아의 잭」 표지 삽화. ‘코리아’ 사람들은 모두 중국식 변발을 하고 있다.
한반도가 위치한 동아시아까지 일찍이 16세기에 배를 몰고 온 유럽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이후 17세기, 18세기에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에 장기 체류했다. 이들은 현지의 삶을 묘사한 글들에서 이따금 조선을 ‘코레아’(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어)나 ‘코레’(프랑스어)로 불렀다. 그때마다 예외 없이 사용된 철자는 ‘c’이다. 이들 라틴어 계열 언어에서‘k’로 시작하는 단어들은 외래어가 아닌 한 거의 없을뿐더러, ‘코레아/코레’의 ‘코’ 소리를 늘 ‘co-‘로 표기한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영어는 게르만 계열 언어이기에 ‘Ko-’를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실제 영어 단어 중에서 ‘ko-‘로 시작하는 말들보다 ‘co-‘로 시작하는 말(college, comedy, core 등)이 압도적으로 많다. 1755년에 출간된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 사전』(Th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는 ‘ko-‘가 철자를 이끄는 단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 사전에서 ‘k’ 부분은 ‘kn-‘에서 끝난다.
독일어에서는 ‘K’가 ‘코’ 소리를 내는 글자다. 고유한 단어(가령 ‘der Kopf’)에서 외래어(가령 ‘der Konsum’, ‘소비’)까지 이 음가를 내는 역할은 ‘K’가 맡는다. 독일어로 ‘코레아’는 예나 지금이나‘Korea’다. 그러나 독일어 ‘Korea’는 라틴어 계열 유럽 언어들이 명명한 표기 그대로 차용한 형태일 뿐이다. 독일어와 독일인이 한반도까지 온 역사는 지엽적이고 또한 라틴어 계열 언어를 쓰는 유럽인들에 비해 한참 후이다. 동아시아에 먼저 와 있던 유럽인들의 언어에서 ‘한국’의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Co-‘로 시작한다.
영어에서 언제 어떻게 왜 ‘Corea’가 ‘Korea’가 되었는지는 별도로 다뤄야 할 중요한, 또는 사소한 문제이다. 분명한 사실은 코리아가 ‘Corea’이던 시절의 수모와 처량함을 ‘Korea’는 당당히 극복했다는 점이다. 이제 전 세계인이 ‘K컬처’에 열광하는 시대를 열었다고 자부하는 마당에 이렇듯 사소한 알파벳 표기의 역사에 주목할 이유는 별로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