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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은 가슴에 붙인다

강인욱_경희대 사학과 교수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소련에서 한국계의 대표적인 가수 빅토르 최는 죽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빅토르를 좋아하는 사람과 아직 빅토르 최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농담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빅토르 최는 한국계라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의 노래와 가사는 오히려 그 어떤 가수보다 더욱더 러시아적이었기에 수많은 러시아 사람이 모두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 한국에서 가수 윤도현이 다시 불러 인기를 얻은 “혈액형”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제목은 군인들의 군복에 새겨진 혈액형을 의미한다. 그 가사는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군인의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특히 ‘내 소매에 새겨진 혈액형이여, 나에게 행운을 다오…’라는 후렴 가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군복 왼쪽 가슴 부위에 새겨진 혈액형
한국과 달리 구소련계에서는 ‘혈액형’이 아니라 ‘혈액 그룹’이라고 한다. 그리고 1번 그룹은 O형, 2번 그룹은 A형, 3번 그룹은 B형이다. 러시아나 구소련으로 가는 사람들은 혹시 병원 갈 일이 있으면 꼭 기억해야 한다. 나도 유학 시절, 발굴장에서 상처를 입어 시골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러시아식 혈액형 원리를 잘 모르고 B형이라고 하자 의사와 간호사들은 순간 당황하여 “그래서 어떤 그룹이지?”를 되물었다. 결국 혼동을 방지하고자 다시 응급실에서 채혈한 일을 겪기도 했다. 노래 “혈액형”은 혈액형이 새겨진 군복을 입는 군인을 말한다. 실제로 전쟁에서 의식을 잃고 위태한 응급상황에서 부상병에게 별다른 문의 없이 그냥 수혈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구소련권의 모든 군인과 국경수비대의 유니폼에 혈액형은 소매가 아니라 왼쪽 가슴흉 장에 단다. 실제 전쟁 중에 가장 훼손이 적은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고, 또 인공호흡 등 응급 처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슴이기 때문이다. 또한 왼쪽 가슴은 심장이 있으니 이 혈액형을 써놓은 부분이 파손될 정도의 부상이라면 이미 살아있을 가능성이 적다는 뜻도 숨어 있다. 모든 군복에 혈액형이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야전에서 입는 군복에만 표시가 된다. 그러니 혈액형이 쓰인 군복을 입는 군인의 심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은 자기 군복 위에 꿰맨 혈액형 부분을 쓰다듬으며 무사 귀환을 바라곤 했을 것이다.

아르바뜨거리에서 탄생한 노래 “혈액형”
그런데 정작 빅토르 최의 노래 때문에 군복의 혈액형은 많은 오해를 사게 되었다. 빅토르 최의 노래에서 혈액형은 가슴이 아니라 ‘옷 소매’에 있다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 덕에 실제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로 군복의 소매에 혈액형이 적혀있는 줄 오해하기도 한다. 빅토르 최는 후에 왜 혈액형이 ‘옷 소매’에 있다고 불렀는지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그가 노래를 만들던 1980년대는 소련이 막 개방하여서 젊은이들은 서방에서 유행하는 문화를 접하던 때였다. 이에 멋쟁이 청년들은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청바지와 유행하는 옷을 입고 경쟁하듯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 이때 빅토르 최와 같은 예술가와 청년들이 주로 다니던 거리가 서울 대학로나 신촌쯤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의 ‘아르바뜨’ 거리였는데 지금도 이 아르바뜨거리에는 ‘초이(Choi)’를 추모하는 다양한 기념물이 존재한다.

“혈액형”이라는 노래는 바로 이 아르바뜨거리에서 탄생했다. 빅토르 최는 1980년대 중반 아르바뜨거리에서 뜻도 모를 글자가 쓰여 있는 멋있는 군용점퍼를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빅토르 최는 그에게 다가가 어디에서 샀냐고 캐묻고 그 소매에 있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말이 막힌 상대는 ‘혈액형’이라고 했다고 한다. 빅토르 최는 그 순간 “혈액형” 노래의 악상을 떠올렸다. 그가 소매에 혈액형이 있다는 표현을 남긴 이유는 실제 군복과는 다르지만, 두 손을 불끈 쥐고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터질듯한 감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노래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군대에 가보지 못한 젊은이 중에는 막연하게 군복의 소매에 혈액형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군관학교에 입학하면 교관이 가장 먼저 “여러분의 혈액형은 소매가 아니라 가슴에 있습니다.”라는 일성으로 연설을 시작할 정도이니 말이다.

빅토르 최의 은유가 섞인 노래가 이제는 비참한 현실이 되고 있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가슴에 혈액형을 적은 젊은 군인들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는 시간이 1년 반을 지나고 있다. 전쟁에서 진짜 수혈하기 위해 가슴에 적힌 혈액형을 봐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 지금, 이 시각에 일어나고 있다.

그 와중에 빅토르 최의 노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시내에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부르던 청소년을 적성 국가의 노래를 불렀다고 신고해서 며칠 동안 구금을 한 것이다. 빅 토르 최는 한국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를 두었고, 태어난 곳은 카자흐스탄이었다. 그리고 전 생애를 러시아가 아니라 소련에서 보냈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마치 조선시대 함경도의 민요를 불렀다고 북한 노래를 부른 것으로 매도하는 격이다. 그만큼 정치적인 갈등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가장 가까웠던 두 나라 사이에 적대심이 불타고 있고 오해와 갈등은 깊어진다.

하지만 세계는 어느덧 피를 흘리는 전쟁을 조금씩 잊고 있다. 그나마 나오는 뉴스도 이 전쟁 이 각국에서 예정 중인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전후 재건 사업의 경제적인 이익은 누가 차지할지 등을 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사이에 수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가는 것은 어느덧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빅토르 최는 “혈액형”에서 혼란했던 소련 말기의 삶이 비극이라고 노래했는데, 실제로 피를 흘리는 지금은 지옥 같은 삶이 아닐까.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을 전장의 군인들에게 빅토르 최의 노래 같은 희망을 보낸다. “혈액형” 노래의 가사인 ‘전쟁에서 행운을, 부디 행운이 있기를’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절박한 심정으로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모두 무사하게 집에 돌아가서 가족의 품에 안기길,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평화를 찾고 나서 지난 40여 년간 함께 불렀던 빅토르 최의 노래를 웃으면서 합창하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