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타일 공예 아줄레주(Azulejo)
이승용_한국외대 포르투갈어과 교수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 나라의 먹거리, 볼거리는 뭔지 그리고 어떤 이국적인 모습이 있을지 찾아보고 미리 상상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팬데믹 이후 해외여행이 다시 시작되면서 포르투갈도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꼭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포르투갈에 가면 뭘 먹고 어떤 것을 볼까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대표적인 먹거리로는 대구요리가 유명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뽀르뚜(Porto)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표적인 공예품으로 내세우는 아줄레주(Azulejo)라는 타일 공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 수용성을 대표하는 아줄레주
아줄레주는 크기가 다양하지만 통상 15cm X 15cm 정도 크기의 세라믹 타일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그려진 문양을 연결해서 큰 그림을 만드는 공예로 그 뿌리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에 두고 있다. 아줄레주라는 말도 작은 돌조각을 뜻하는 아랍어 ‘al-zulayj’로부터 왔다. 세라믹 타일은 스페인, 이탈리아, 튀르키예, 네덜란드, 모로코 등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포르투갈의 아줄레주는 15세기 유입된 이후 500년 동안 지속해 사용되었고, 포르투갈 건축에서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단순히 장식적인 측면을 넘어 포르투갈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세라믹 타일과는 차별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세라믹 타일은 물이나 불이 닿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슬람 문화권이나 이슬람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건축자재의 기능을 넘어서 장식예술로써 사용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세라믹 타일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종교적 이유가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형태의 아이콘을 금지하고 있어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사용된 것이 색상이 다른 타일들을 이용해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이 장식 예술로서의 아줄레주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줄레주는 유럽에 들어오면서 형태에 따라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이용하는 ‘이스파노-아라비코(Hispano-arabico) 양식’과 아이콘을 사용하고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과 같은 ‘마요르카(Majorca) 양식’으로 구분한다. 특히 마요르카 방식 이전에는 양각, 음각, 부조 등의 기법을 통해 타일을 제작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타일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법이 개발되면서 타일 공예가 한 걸음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의 이베리아반도 진출과 더불어 아줄레주 또한 이베리아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아줄레주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살았던 지금의 스페인, 포르투갈 예술가나 장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문화 수용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베리아반도는 711년부터 1492년 영토 수복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포르투갈은 지리적으로도 아프리카와 유럽의 경계에 위치하고 문화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 단층선에 놓여 있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더 높은 이문화 수용성을 보이는데, 이슬람 세계에서 유래된 아줄레주를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적 이미지를 결합해 자신들 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빛에 반사되는 타일의 재료적 특성과 강렬한 색상의 결합에 이국적인 매력을 느꼈다.
포르투갈 아줄레주의 특징
포르투갈에 아줄레주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503년 세빌리아를 방문한 마누엘 1세가 아줄레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장인들을 포르투갈로 불러오면서부터다. 15, 16세기 아줄레주 제작은 전통적인 이슬람 방식을 따르고 있었으나 내용은 기하학적인 문양에서 벗어나 유럽의 식물이나 동물 등의 모티브가 사용되었다. 반면에 벽 전체를 타일로 장식하는 이슬람 양식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포르투갈 아줄레주가 기하학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것을 표현하기 시작했지만, 17세기에도 여전히 반복적인 형태로 타일 조합을 선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르투갈 아줄레주는 색상을 통해서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는데, 16세기에는 가용한 모든 색을 사용하고 있으며 17세기에는 주로 백색, 청색, 황색을 사용하고 18세기에는 주로 청색과 백색이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는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네덜란드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이 포르투갈 아줄레주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아줄레주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졌으며,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에 영향을 받아 표현이 더욱더 풍부해진다.
포르투갈 아줄레주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실내 장식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건물 외부의 마감재 또는 외부를 장식하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포르투갈 시내를 다니다 보면 건물 정면 전체나 외관 일부가 아줄레주로 장식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포르투갈은 아줄레주를 건물의 안과 밖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빈 곳을 싫어하는 아랍문화의 영향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비극적인 리스본 대지진(1755)과도 연관성이 있다.
리스본 대지진은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지형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었기 때문에 현재 리스본 시내에 있는 대부분 건물은 대지진 이후 새롭게 건축된 건물들이고, 그 이전의 오래된 건물들은 바이루 알뚜(bairro alto)라는 조금 높은 언덕 지역에만 남아 있다. 대지진은 건물의 붕괴나 파손과 같은 물리적 피해도 가져왔지만, 위생 문제로 인한 질병과 전염병이 발생할 위험성도 동반했다.
당시 리스본 재건의 책임자였던 뽕발 남작(Marquês de Pombal)과 왕실은 무너진 건물을 신속히 재건축하고 보수하기 위해 아줄레주를 적극 사용하였다. 건물 내·외벽 부조로 장식하는 것 보다 타일을 이용해 마감과 장식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었고, 타일이 오염 제거가 다른 자재들에 비해 쉬웠기 때문이었다. 뽕발 남작은 아줄레주의 이런 기능적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리스본 복구 작업을 주도했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건물들이 16세기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마누엘 양식(manuelino)에 빗대어 뽕발 양식(pombalino)이라고 한다.
현대 아줄레주는 건축 자재나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고전적인 모티브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현대 예술에 걸맞은 다양한 창조적인 모티브들을 아줄레주 위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도자기가 도구로서의 도자기가 있는가 하면 예술품으로서 도자기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줄레주의 이중적 성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줄레주는 단순한 타일이 아니고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 융합의 상징이며, 포르투갈과 포르투갈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기록물이며, 이제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포르투갈의 거리를 걸으면서 아줄레주를 볼 때 한 번쯤 아줄레주의 역사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미술 작품을 관람하듯이 감상해 보면, 더욱 즐겁고 풍요로운 포르투갈 여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