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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그리고 쇼팽

최성은_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교수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두었지만,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은 ‘폴란드가 낳은 음악가’로 불린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국제 쇼팽 콩쿠르도 프랑스가 아닌,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쇼팽 자신도 자신을 폴란드인이라 여겼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 음악의 세계에 눈을 뜨고, 자신의 예술혼을 자각한 곳이 바로 폴란드였기 때문이다.

쇼팽의 이름은 폴란드어로는 프리데릭(Fryderyk), 프랑스어로는 프레데릭(Frédéric), 영어로는 프레데릭(Frederic)으로 표기한다.

여섯 살의 나이에 어머니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쇼팽은 열두 살 때, 바르샤바 음악원(지금의 국립 쇼팽 음악대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유제프 엘스네르(Józef A. F. Elsner: 1769~1854)로부터 음악 이론과 작곡을 사사했고, 폴란드의 전통 음악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청소년기에 쇼팽은 종종 바르샤바를 떠나 폴란드 시골을 여행하며 폴란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도취했고, 농민들의 민속춤과 노래를 접했으며, 폴란드의 문학이나 역사 관련 수업을 듣기도 했다. 쇼팽에게 애틋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고,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라르게토의 영감을 안겨준 대상 또한 폴란드 여인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 1810~1889)였다.

열아홉의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재학 중 동갑내기 성악도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를 짝사랑했다.

폴란드를 향한 그리움
스무 살이 되던 해, 유학을 위해 폴란드를 떠난 쇼팽은 빈을 거쳐 파리에 머물면서도 줄곧 고국을 그리워했다. 1830년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11월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폴란드의 많은 정치인과 예술가들이 망명의 길을 택했다. 쇼팽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에 정착했다. 조국의 독립 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쇼팽이 에튀드 제12번 C 단조를 작곡했고, 훗날에 이 작품에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폴란드의 봉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파리와 런던 등에는 폴란드에서 온 망명객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겼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이주한 동료 예술가들과 교감하며,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가득한 폴란드의 낭만주의를 자신의 음악을 통해 구현했다. 쇼팽의 음악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과 동료 망명객들을 조국 폴란드와 맺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폴란드인 쇼팽은 초반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나중에는 작곡가로서 프랑스에서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치밀한 기교와 시적인 표현, 강렬한 파토스와 대담한 악상으로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피아노 음악의 혁신을 이루어낸 것이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쇼팽은 오랫동안 지병인 폐결핵에 시달렸다. 그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 폴란드와 그곳에 남겨진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그가 폴란드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는 폴란드를 향한 절절한 향수가 생생히 드러나 있다.

쇼팽이 가족에게 보낸 친필 편지(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소장)

쇼팽이 가족에게 보낸 친필 편지(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소장)

쇼팽의 나이 서른아홉, 임종을 앞둔 쇼팽은 누나 루드비카(Ludwika Jędrzejewicz: 1807~1855)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을 보러 프랑스로 와달라고 부탁하면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줏대 없는 변덕이 오늘은 이렇게 가족을 보고 싶어 하네…”

하지만 그 무렵 쇼팽은 이미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평소 남동생의 어투와 문체를 누구보다 잘 알던 루드비카는 행간에 담긴 쇼팽의 진심을 읽고는 곧바로 파리로 향했고, 쇼팽의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마련된 쇼팽의 무덤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송별식에서 친구들이 은잔에 담아준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쇼팽의 심장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에서 적출되어 유리 단지에 담겨 봉인된 채, 누이의 치마폭에 숨겨져 은밀히 폴란드로 반입되었고, 훗날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비록 육신은 프랑스에 묻혔지만, 쇼팽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그의 심장은 꿈에 그리던 모국, 폴란드로 돌아왔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쇼팽이 활동했던 19세기 전반기, 유럽 예술의 주류는 프랑스혁명과 독일 관념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였다. 외세의 강점으로 유럽 지도에서 그 이름이 사라진 수난과 질곡의 땅, 폴란드에도 낭만주의의 물결이 퍼져나갔는데, 1830년 ‘11월 봉기’로 알려진 반러시아 무장봉기를 계기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어머니와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쇼팽은 폴란드 낭만주의 시인들의 사상에 열렬히 심취하였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조국애를 작품 속에 투영했다. 쇼팽은 ‘폴란드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 1798~1855)의 서사시와 『발라드(Ballady)』 에서 영감을 받아 네 편의 발라드를 작곡했으며, 마주르카나 폴로네이즈와 같은 폴란드의 민속 춤곡을 독자적인 장르로 승화시켰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중 가장 웅장하고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 폴로네이즈 제6번 A♭장조 “영웅”은 열강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폴란드의 민족혼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인다. ‘향수’라는 부제가 붙은 녹턴 제11번 G 단조는 절친한 벗인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Tytus Wojciechowski: 1808~1879)와의 추억과 폴란드의 전원 풍경을 떠올리며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민족의 암흑기에 서유럽에서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쇼팽은 폴란드 민족에게 한줄기 등불과도 같은 빛을 던져준 예술가였다. 그가 피아노를 매개체로 쏟아낸 아름답고도 처연한 선율은 수십만 장의 선언문보다 강력하게 유럽의 양심을 뒤흔들었다. 낭만주의 시대, 쇼팽의 음악은 나라 잃고 방황했던 폴란드 민족에게 정서적 위안과 단결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쇼팽과 동시대를 살았던 낭만주의 시인 치프리안 노르비드(Cyprian Norwid: 1821~1883)는 1849년 10월 25일 ‘포즈난 일보[Dziennik Poznański]’에 실린 쇼팽의 부고에서 이 위대한 음악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출신은 바르샤바인, 심장은 폴란드인, 재능은 세계 시민.”

러시아에 의해 강제 점령당한 바르샤바의 근교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에서 음악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심장만이라도 폴란드 영토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쇼팽. ‘세계 시민’이라는 노르비드의 표현처럼 그의 빛나는 재능은 폴란드와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여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