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언어, 그리고 마음의 교감
이영민_이화여대 사범대학 사회과교육과 교수
20년 전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이다. 코르도바역에 내려 유명한 관광지, 메스키타를 찾아가던 중 길을 잃었다. 당시만 해도 번역기 앱은 고사하고 휴대폰 자체가 그리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에서 로밍서비스는 무척 비싸서 감히 이용하기가 어려운 때였으니 아날로그 시대의 종이지도만을 들고 열심히 길을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때 어쩔 수 없이 지나가던 풍채 넉넉한 중년의 남자에게 지도를 들이밀고 영어로 길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스페인어밖에 말할 줄 몰랐다. 마음은 참 고마웠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속으로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등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언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남자는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따라오라는 시늉과 함께 앞장서 길을 걸었다. 몸으로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약 500미터 정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서로의 말을 모르니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저 이따금 눈웃음만 주고받으며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로수 길을 뚜벅뚜벅 걸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메스키타가 눈에 보이자마자 그는 그곳을 가리킨 후 뭐라고 한마디를 내뱉은 채 등을 보이고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감동이 내 마음에 퍼져갔다. 다정다감하게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마도 언어 차이의 극복, 즉 번역 기술의 급진전이 아닐지 싶다. 영어 등 선진국의 주요 언어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모국어 대부분이, 심지어는 지구촌의 구석진 지방어조차도 이제 번역기 앱을 통해 실시간 번역 가능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할 줄만 안다면 20년 전 스페인에서 내가 경험했던 그런 에피소드는 이제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휴대폰 번역기의 도움을 톡톡히 받으며 보르네오섬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보르네오섬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공화국,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분할되어 있다. 코타키나발루로 들어가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 지역을 거쳐 브루나이 공화국을 여행할 때는 공용어로 영어가 통용되고 있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두터운 열대우림이 펼쳐진 오지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해안가의 큰 도시에서도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현지인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소 난감했다. 하지만 휴대폰 번역기 앱으로 한국어-인도네시아어를 실시간으로 옮겨 다니며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재미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 식당에서는 블랙핑크의 열렬한 팬인 종업원과 블랙핑크의 사진까지 서로 보여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4년 전 일이었다.
올해 봄, 발칸반도에서 발트 3국까지 유럽의 동쪽을 종단하는 여행에서도 번역기 앱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종교와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과거 인종청소 같은 무서운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었기에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은 꽤 조심스러웠다. 실제로는 별문제 없는 평화로운 곳이 되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여행자를 힘들게 했을 언어적 소통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과 4년 만에 그 기술의 혁신은 놀랄만한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언어 장벽이 허물어진 세상…… 가만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그저 격세지감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우리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점점 더 실감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교감도 자동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과연 언어의 기능적 소통이 마음의 소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스페인의 그 남자가 몸으로 길 안내를 해주었던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정과 배려심이 넘쳤기 때문이 아닐까? 인도네시아 식당 종업원의 친절과 교감은 언어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류로 인해 장벽이 허물어진 그 어떤 일체감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외국 여행에서 감동을 얻게 된 경우를 생각해 보라. 단지 언어가 통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고운 언어와 친절한 행동을 전달받았을 때 감동하게 된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언어의 소통은 마음의 교감을 이루어 내는 필요한 조건임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말을 섞을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인정과 배려의 넉넉한 마음을 깔고 언어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세계화의 진정한 소통의 순서가 아닐지 싶다. 마음의 교감과 배려가 담긴 언어적 소통은 번역기 앱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사람의 육성으로, 대면적 접촉으로 주고받는 행동과 말투로 언어적 소통을 마음의 교감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진정 필요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