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연애와 결혼
김종덕_한국외대 일본언어문화학부 명예교수
근대 이후 대부분의 문명국가는 일부다처혼을 폐지하고 일부일처제를 법률로 정하고 있지만, 신화전설이나 고대 왕권 확립기 전후의 결혼제도는 일부다처제가 많았다. 문학에 나타난 남녀의 성애와 결혼제도는 그 나라의 문화 풍토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일본은 유교의 영향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인지 남녀의 연애와 결혼을 묘사한 작품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고대 일본에서는 봄가을 산이나 물가에서 우타가키(歌垣, 혹은 가가이)라는 행사를 통해 남녀가 노래하며 상대를 만나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정사 중의 하나인 『속일본기』(797)에는 우타가키의 행사가 궁중에서도 개최되었는데, 백제로부터 이주한 귀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고대 남녀의 사랑과 결혼제도, 에로티시즘의 문제는 그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제사나 노동과 함께 문학 발생의 주요 동기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794~1192) 귀족사회의 결혼 형태는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였는데, 가장 많은 것은 방처혼(訪妻婚)이었고 초서혼(招婿婚), 가취혼(嫁娶婚) 등이 뒤섞여 있었다. 방처혼은 남녀가 서로의 평판을 듣고 와카(和歌)를 주고받거나, 여자가 연주하는 거문고 등의 음악을 듣고 관심을 가지면서 시녀의 안내로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왕래하는 결혼 형태였다. 그리고 초서혼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결혼이었고, 가취혼은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는 결혼이었으며, 대체로 남자 15세, 여자 13세 전후에 혼인하는 조혼(早婚) 풍습이 만연해 있었다. 이에 결혼을 나타내는 표현도 ‘구애하다(よばふ)’, ‘다니다(かよふ)’, ‘만나다(あふ)’, ‘살다(すむ)’ 등의 동사 표현이 많았다. 『에이가 이야기(栄花物語)』에는 섭정·관백이 되는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頼通, 992~1074)가 산조(三条) 천황 둘째 황녀와의 혼담이 오가자, 정처(正妻)인 다카히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를 들은 아버지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7)는 요리미치에게 ‘남자가 어찌 한 사람의 아내로 만족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결혼을 강요하자 하는 수 없이 황녀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섭정, 관백 등 최고 귀족들이 정처를 맞이할 때는 정략적인 결혼이 많았으나 후처와의 결혼은 방처혼 형태가 많았다. 즉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결혼 형태는 신분과 집안에 따라 방처혼과 초서혼, 가취혼 등 다양한 결혼 형태가 혼재하다가 무가시대가 되면서 점차 가취혼이 늘어난다.
헤이안 시대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기록은 뇨보(女房)와 같은 지식인 여성들이 한자를 초서화한 가나문자로 기술한 와카, 일기 수필, 모노가타리(소설) 속에 남녀의 연애와 결혼생활, 다처혼에 대한 불합리성 등이 담겨있다. 이 시대 궁중에서 일했던 뇨보라고 하는 여관(女官)들은 우리나라의 궁녀와 달리 남녀 교제와 결혼만이 아니라 궁녀를 그만둘 수도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의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리고 소설에는 사랑을 위해서는 불륜이나 자신의 파멸도 마다하지 않았던 연애지상주의를 그린 내용도 많았다.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불교의 숙세(宿世)와 윤회사상이었기에 남녀가 밀통의 관계를 맺고도 율령에서 정한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자신들의 행위가 전생으로부터의 인연이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대목을 많이 읽을 수 있다. 근세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서 주인공 히카루겐지와 후지쓰보의 불륜관계를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기 위해 진흙탕 물을 가둔 것이라 하고, 남녀의 사랑을 연꽃에 밀통을 진흙탕에 비유했다.
남녀의 이혼과 이별에 관한 법률로는 『양로율령(養老律令), 718』에 칠거지악이나 남자가 행방불명되어 3년간 돌아오지 않으면 여자가 재혼할 수 있다는 등의 규정이 있다.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24단은 남자가 시골에 여자를 두고 3년간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던 여자가 꼭 3년째 되는 날에 다른 남자와 재혼하려는데 원래의 남편이 돌아오자, 이별의 와카를 증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에도 시대에는 여성이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 3년이 지나면 이혼이 성립되는 규정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혼하는 사연을 들여다보면, 남녀의 사랑이 식었을 경우와 극도로 가난해졌을 경우가 많았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에서 뇨보와 희롱하는 귀족들(紫式部日記絵巻, 五島美術館蔵)
헤이안 시대 문학에서 연애와 풍류를 즐기는 사람을 ‘이로고노미(色好み)’라고 했는데,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905)』 등에는 이로고노미의 첫째 조건으로 ‘와카’를 잘 읊어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에는 『이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풍류인 아리와라 나리히라(在原業平, 825~880)가 헤이제이(平城) 천황 아보(阿保) 황자의 다섯째 아들로, ‘외관이 수려하고 방종하며 구애되지 않는다. 한문의 재능은 없지만 와카를 잘 읊는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한학자인 사관의 입장에서 백제에서 이주한 엄마를 둔 나리히라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지만, 나리히라가 미남이고 와카에 뛰어난 ‘이로고노미’였다는 특징을 잘 파악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이세 이야기』에는 남자만이 아니라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와 같은 미녀들도 ‘이로고노미’로 칭하여, 남녀의 구별 없이 연애의 정취를 잘 이해하는 ‘풍류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이외에도 『헤이주 이야기(平中物語)』의 다이라노 사다분(平貞文), 미나모토 이타루(源至) 등과 같이 문학의 남자 주인공으로, 백제로부터 이주한 풍류인이 자주 등장한다.
이후 중세가 되면 무사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전쟁과 원거리의 정략결혼이 많아지자, 점차 방처혼이 줄어들고 인질 형태의 가취혼이 늘어난다. 근세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93)는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 등의 호색물을 기술했는데, 『호색일대남』의 주인공 요노스케(世之介)는 7세부터 60세까지 54년 동안 여인 3,742명, 남색 725명과 향락세계를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도 하인 레포렐로가 엘비라에게 자신의 주인은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지에 2,065명의 애인이 있다는 카달로그송을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호색일대남』이나 『돈 조반니』에서 ‘호색’이라 함은 오로지 여색을 탐하는 것만을 과장되게 이야기할 뿐, 이상적인 ‘이로고노미’로서 왕권을 획득하는 조건으로 보는 시각은 없다.
『겐지 이야기』에서 남편 유기리가 읽고 있는 편지를 뺏어가는 구모이노가리(源氏物語絵巻, 徳川美術館蔵)
‘이로고노미’라는 술어에 대해 민속학자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 1887~1953)는 『겐지 이야기』의 세계를 ‘이로고노미’라는 술어로 해석하려 했다. 오리구치는 ‘이로고노미’를 고대 영웅이 왕권을 획득하기 위한 최대의 미덕이며 일본인의 이상으로 파악했다. 즉 고대 일본어에서 이로(色)는 여성이란 뜻이며, 고노미(好み)는 선택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호색과 ‘이로고노미’는 서로 다르고, 한자어를 호색으로 쓰는 것은 가장 가까운 의미를 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겐지 이야기』에서 인간의 가장 훌륭한 미덕은 ‘이로고노미’이며 주인공 히카루겐지는 ‘이로고노미’의 미적인 생활을 일관했던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고대의 신화 전설에 나타난 영웅이 지방을 평정할 때는 와카의 증답을 통해, 그 지방의 무녀적인 여성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예를 들고 있다. 이러한 혼인 관계가 헤이안 시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궁녀를 바치거나, 섭정·관백의 집안이 천황의 외척으로 정권을 잡는 형태로 남게 된다. 그리고 중세 이후에는 이상적인 ‘이로고노미’가 왕권을 획득하는 풍류인의 논리는 점차 희박해지고, 희화화되거나 평범한 남녀의 ‘호색’을 지칭하는 의미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