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 호숫가에서 만난 리스트와 페트라르카
윤혜준_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만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산 사람끼리의 만남도 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만남도 있다. 전자의 예는 굳이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자의 만남은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만남이기는 하나, 때로는 산 사람들의 만남보다 더 풍성한 결실을 보는 경우도 있다. 사실 내가 이제껏 해온 인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근사하고 난해한 말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아주 쉽게 말하면, 인문학은 아직 살아 있는 자와 죽은 대가들이 남긴 글과 만나고 사귀는 일이다. 그러한 만남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이렇게 물으며 조롱한다. 하지만 죽은 이들과의 만남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소유하고 소비하는 물질이 아무리 넘친다 해도 그다지 풍족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짧은 인생에 비해 훨씬 더 긴 삶을 죽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반면, 내 소유물을 소비하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만족감은 급속히 감소하고 공허함만 늘어날 수 있다.
죽었으나 아직 자신들의 업적 속에 살아있는 이들과의 만남은 나의 경우 책의 형태로 그 결과물을 남긴다. 최근에 낸 교양서 『인생길 중간에 거니는 시의 숲: 윤혜준 교수가 안내하는 서양 명시 산책』에는 죽은 시인들과 나의 만남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시인들의 경우에는 이들과 다른 대가들의 만남도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와 19세기 헝가리 출신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만남이다. 이들은 어디서 만났을까?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Lago di Como) 남쪽 기슭의 벨라조(Bellagio), 빌라 멜치(Villa Melzi) 저택이다. 언제 만났을까? 리스트가 이곳에 머물던 1837년이다.

리스트는 피아노 신동으로 일찍이 고향을 떠나 만 11세에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데뷔한 후로,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본인의 뛰어난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만 13세가 되는 1823년에는 피아노곡을 작곡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리스트는 파리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부친이 먼저 사망하자 모친과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성인 남성으로 성장하던 리스트는 연주력을 키우며 자신만의 음악적 어법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파리에서 20대의 준수한 청년이 된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사람도 깊이 사랑했다. 스물두 총각 리스트는 파리에서 귀족 부인 유부녀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1876)와 사랑에 빠졌다. 젊은 천재의 순수한 사랑도 뜨거웠지만, 무려 6년이나 연상인 마리의 열정도 만만치 않았다. 마리는 원래 독일 출신으로, 다구 백작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백작 부인의 신분을 얻기는 했으나 부부간에 사랑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남편이나 부인이 겉으로는 부부지만 각자 알아서 삶을 즐기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마리는 곧 그러한 전통마저 깼다. 그녀는 아예 1833년 남편과 파리를 버린 후, 리스트와 함께 스위스와 이탈리아 도시들을 방랑했다. 이 시기 리스트는 음악뿐 아니라 문학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살아 있는 매력적인 연상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그는 죽은 이탈리아 시인들과도 뜨겁게 만났다. 그에게 특히 강렬한 영감을 준 작가는 페트라르카다. 페트라르카의 시가 워낙 멋지기도 하지만 남의 부인 ‘라우라(Laura)’를 멀리서 흠모하는 시들을 수없이 써댄 이 시인의 상황이나 정서에, 다소 유사한 처지에 있던 셈인 리스트가 쉽게 공감했을 것이다.

마리와 함께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돌던 시절 리스트는 일련의 피아노곡 연작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을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시리즈로 발표했다. 첫 번째 모음곡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에 해당한다. 묘사되는 장소들은 모두 스위스에 있다. 두 번째 모음곡은 두 연인이 1837년에서 1839년까지 머물렀던 이탈리아가 배경이다. 『순례의 해』 첫 번째 모음곡과는 달리 두 번째 모음곡은 공간보다는 문학 작품이 표제로 사용된다. 이 중에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제목에 올린 곡이 4번, 5번, 6번, 전체 7곡 중에서 거의 반을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서정적이면서도 울림이 큰 것이 제5곡,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Sonetto 104 del Petrarca)」이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은 나도 무척 좋아하는 시다. 앞서 소개한 『인생길 중간에 거니는 시의 숲』에서 내가 그의 14세기 이탈리아어와 만나 21세기 한국어로 옮긴 대화의 산물은 다음과 같다.
평화를 난 얻지 못해, 또 전쟁도 벌이지 못해, 겁내면서 희망해, 또 불타면서 꽁꽁 얼어, 하늘 위를 날고, 또 땅에 쓰러져 있어 허공만 잡고 있지만 온 세상 두 팔로 끌어안아.
날 옥에 가둔 채, 열어주지도 잠그지도 않아, 자기편을 삼지도 않지만, 포승줄도 풀지 않고, 사랑의 신이, 죽이지도 않지만, 쇠고랑도 그대로, 내가 살기를, 수렁에서 꺼내주기를, 다 원치 않아.
난 눈이 없어도 보고, 혀가 잘려도 외치고, 사라져 죽기를 간절히 바라나, 도움을 간청해, 또 난 내 자신을 혐오하며, 남을 사랑해.
난 슬픔을 먹고살며, 울먹이며 웃고, 죽음이건 삶이건 둘 다 똑같이 신물 나니, 나 이 지경이네, 여인이여, 당신 때문에.

벨라조, 1837년. 페트라르카의 열정과 외침은 벨라조에서 바라보는 잔잔한 코모 호수의 물살에 실려 리스트의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선율과 화성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그 음악은 솟구치며 내려앉고 잔잔하며 끓어오르는, 그야말로 페트라르카적 대립과 대조의 미학으로 꽃핀다. 벨라조, 2023년. 나는 여름 휴가철이라 인파에 치일 각오를 하고 코모 호수 서쪽 부두에서 배를 탄다. 그러나 도착하니 상상 이상이었다. 이 작고 아담한 중세 마을은 엄청난 숫자의 관광객에 깔려 가파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잘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젊은이들을 위한 대중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곳도 아니건만 왜 그리 몰려왔을까? 이곳이 어쩌다 ‘인스타그램 명소’가 된 모양이었다. 문화유산에 대한 기억이나 존중의 태도와는 거리가 먼 자세로 끝없이 사진만 찍어 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