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어준 폴란드 문학
최성은_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교수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침(外侵)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꿋꿋이 수호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닮은 구석이 참 많은 나라다. 18세기 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침략으로 123년 동안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외세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분투한 작가들과 모국어와 문학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남다른 사랑이 더해지면서 역설적으로 민족의 수난기에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풍부한 문학적 토양이 다져졌다. 그리고 다섯 명이나 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학 강국’으로 거듭났다.
* 폴란드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는 헨릭 시엔키에비츠(1905),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1924), 체스와프 미워쉬(1980),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96), 그리고 올가 토카르추크(2018)가 있다.
1795년 삼국 분할로 유럽 지도에서 사라진 폴란드
폴란드는 18세기 후반 세 차례(1772년, 1793년, 1795년)에 걸친 삼국 분할로 유럽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흑해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며 승승장구했지만, 17세기에 귀족들이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귀족 공화국’ 시대가 도래하며 국력이 점차 쇠퇴한 것이다. 농노제가 심화되면서 경제적 쇠퇴와 사회적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그 와중에 스웨덴과 오스만 제국, 코사크족이 연이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국토가 유린당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폴란드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러시아, 발트해로의 연결 통로를 원했던 프로이센, 갈리치아 지역(지금의 서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남부)을 확보하려는 오스트리아가 동시에 폴란드를 침략했다. 외세 점령기에 폴란드가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문학의 역할이 컸다. 당대에 성행하던 낭만주의와 실증주의 문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폴란드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고, 자주독립을 향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낭만주의 문학과 두 차례에 걸친 민족 봉기
19세기 전반기에 애국적 각성과 독립 의지 고취를 위한 선봉에 나선 것은 낭만주의 시인들이었다. 폴란드 문학사에서 ‘3대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아담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 1798~1855), 율리우쉬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 1809~1849), 지그문트 크라신스키(Zygmunt Krasiński: 1812~1859)는 고난과 희생을 통해 조국이 찬란하게 부활하리라고 예언했다. 이들은 폴란드 민족이 겪고 있는 외세 점령의 고통을 예수의 수난에 비유하면서 폴란드 민족에게 ‘메시아적 소명 의식’을 북돋웠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신성한 사명으로 묘사하여 실의에 빠진 폴란드인들을 위로했다. 이때부터 폴란드에서는 문인들이 ‘민족의 사표’로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폴란드 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미츠키에비츠는 극시 『조상제(Dziady)』(1832)에서 폴란드의 수난을 영웅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열망에 불을 지폈다.
“폴란드여! 폴란드여! 나는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리라. 폴란드의 깃발 아래에서 자유가 다시 태어나고, 수난당하는 민족들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크라신스키는 단테의 『신곡』을 패러디한 서사시 『비(非) 신곡(Nie-Boska Komedia)』(1835)에서 ‘문화적 유산을 간직하는 한, 민족은 반드시 생존한다’라고 역설했다.
“자식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민족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좌)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구시가지 광장에 위치한 아담 미츠키에비츠 동상/(우) 실증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
낭만주의 시인들의 주도로 점령국에 대한 저항 의식이 고조되면서 1830년 11월 29일, 폴란드인들은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다. 장교와 사관학교 생도들, 그리고 시민 자원대가 러시아에 항거하기 위해 단합한 무장 독립 항쟁이었다. 하지만 1831년 러시아군에 의해 봉기가 무자비하게 진압되면서 수많은 정치인과 예술가들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로 흩어져 외교적으로 폴란드의 독립을 호소했다. 미츠키에비츠와 스워바츠키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타국에서 집필활동을 이어갔다. 망명 작가들은 폴란드 봉기군을 ‘십자가를 짊어진 희생자’로 묘사하며 국제 사회에서 공감과 지지를 호소했다. 미츠키에비츠가 파리에서 쓴 서사시 『판 타데우시(Pan Tadeusz)』(1834)는 폴란드인들에게는 성서와도 같은 책으로 모든 가정마다 한 권씩은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소중한 작품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기억하던 폴란드의 전통과 풍속,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 작품 덕분에 폴란드인들은 암흑기에도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11월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러시아는 폴란드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는 한편, 폴란드 군대를 해산하고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하는 등 문화 탄압을 자행했지만, 폴란드인들의 투지와 염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1863년 1월 러시아가 강제 징병을 단행하자 지하 혁명 정부가 시민들을 규합하여 폴란드 민병대를 조직, 또다시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전면전을 펼쳤던 11월 봉기 때와는 달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러시아군을 기습하는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봉기군은 러시아 군대와 무려 천 번 이상의 소규모 전투와 접전을 벌였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군사력의 열세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봉기군의 숫자가 3만여 명인 반면, 폴란드 영토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열 배도 넘는 40만 명이나 되었다. 봉기군이 목숨을 바쳐 저항했지만, 결국 1864년 8월, 지하 정부가 색출되면서 1월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폴란드어 사용이 아예 금지되고, 러시아식 교육이 강요되었으며, 귀족들은 대거 체포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상) 파리에서 출간된 아담 미츠키에비츠의 <판 타데우시> 초판본/(하) 신문에 연재되었던 <인형> 첫 회, 볼레스와프 프루스
실증주의 문학과 사회 개혁, 그리고 국가 재건
두 차례에 걸친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폴란드 문학 또한 낭만적 이상주의에서 현실에 바탕을 둔 개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19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실증주의 작가들은 무력 항쟁이나 영웅적 희생보다는 계몽과 교육, 법과 제도의 개혁, 군사력 강화와 경제 발전이 독립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강조했다. 또한 실패한 봉기를 감상적으로 미화하려는 자세를 지양하고, 현실적인 대안과 실용적인 독립운동 전략을 고민하게 되었다.
근대 소설의 기틀이 마련된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1905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헨릭 시엔키에비츠(Henryk Sienkiewicz: 1841~1910)를 들 수 있다. 그는 낭만주의의 애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을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가였다. 시엔키에비츠는 『불과 검으로(Ogniem i mieczem)』(1884)와 같은 역사소설을 통해 폴란드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재조명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다. 작품 속 대사인 “우리가 살아있는 한,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폴란드 국가(國歌)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고, 가사의 첫마디로 삽입되었다.
볼레스와프 프루스(Bolesław Prus: 1847~1912)는 대표작 『인형(Lalka)』(1890)에서 19세기 말 산업화 대열에 동참한 폴란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귀족 사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한편,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과 교육 기회의 확대 등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자유는 꿈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매일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여성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엘리자 오제슈코바(Eliza Orzeszkowa: 1812~1859)는 소설 『니에멘 강변에서(Nad Niemnem)』(1888)에서 농민의 애환과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조명하며, 사회 개혁과 계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지속적인 노동과 체계적인 캠페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은 외침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노동에서 태어난다.”
19세기 후반, 실증주의 문학은 폴란드인들에게 언어와 역사,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독립을 이루려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덕분에 폴란드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널리 확산했고, 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가 123년 만에 독립을 되찾고 제2공화국 정부를 출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실증주의 문인들은 문학이 국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며, 사회 개혁과 정치적 변화를 촉구했다. 덕분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고,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문학의 열정으로 타오른 독립운동의 불꽃
폴란드인들에게 문학은 독립 투쟁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자 도구였다. 낭만주의 문학이 혁명적 열정을 촉구했다면, 실증주의 문학은 폴란드의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했다. 독립을 향한 불꽃을 지핀 낭만주의, 그리고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실증주의, 두 문학 사조는 폴란드의 독립운동에 이바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폴란드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감성과 이성의 토대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