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세계 속으로
김은희 작가
나는 부산에 살고 있다. 사는 곳과 업무 동선이 모두 바닷가에 가깝다. 바닷가는 언제나 이방인들로 가득하다. 어제는 해운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는 일본인이, 뒷자리에는 스페인 사람이, 저기 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중국인들이었다. 아니, 아니,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들이었고, 중국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들이었다. 아시다시피, 일본어는 대체로 일본인들만 구사하는 언어이며, 한국인들은 그 뜻은 몰라도 그 말이 일본어인 것은 아주 잘 안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그 외 언어들은 특정 국가의 공용어 중 하나인 경우도 제법 있으니, 영어를 구사한다 해도 반드시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언어는 아예 가늠조차 안 된다. 피부색과 인종, 언어가 제각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구름처럼 부산에 몰려들고 있다. 요즈음 외국인들이 정말 많이 눈에 띈다. 내가 아는 외국인 친구들도 외국인들이 정말 많다고 얘기한다. 아주 가끔 버스 기사와 나만 한국인일 때도 있다. 나는 이런 일이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통해 나의 지난 여행을 복기하곤 한다. 그들은 어찌하여 부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뭔가에 홀렸을까. 나는 그 뜨거움의 실체가 몹시 궁금했다. 내게 이방인들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피곤한 얼굴을 한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잠시 잠깐 정주를 하건, 짧은 여행을 하건,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지쳐 있었다. 지쳐버린 연인, 지쳐버린 친구, 지쳐버린 가족. 여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인 것이다. 혹자는 여행은 경험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른다면, 외노자의 경험만이 경험인 셈이다. 하지만 여행은 그 기간과 상관없이 고도로 압축된 고강도의 노동이다. 가끔은 스포츠 같다는 생각도 한다. 잘 먹고 잘 자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기도 하다. 심지어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한방에 태워버린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낭비가 또 있을까. 그들은 얘기하겠지.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부산에 가봤다고. 나도 그랬다. 베이루트에 가봤다고, 다마스쿠스에 가봤다고, 말이다.
여행은 장소적 경험이다. 세상은 과잉 연결되었고, 그래서 미지의 세계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좀 슬펐다. 내가 모르는 장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 무모한 믿음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렇다. 나는 덜떨어진 생각이란 것을 했었다. 나는 여전히 촌스럽게도, 동양인의 외피를 두른 이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을 신기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 번쯤 뒤돌아본다. 이방인이 이방인인 까닭은 생김새가 다른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타일이 다른 것이 더욱 크다.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한국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대체 저런 원피스는 어디에서 샀지? 저 운동화 디자인이 독특한데? 저 대담한 노출은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그들에게서 풍기는 체취, 다양한 문양의 타투 등등. 그들과 우리는 기어이 차이를 드러내고야 만다. 옛날 옛적, 한 이집트인 할아버지가 나의 무릎 찢어진 청바지를 참으로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었다. 나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 할아버지의 마음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놓인 간극이었다.

나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만난 외국인의 수를 꼽아보니, 이래서 “요즈음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아?”라는 밈이 회자되는구나 싶었다. 부산에 거주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 결혼 이주여성들, 외국인 기업가들, 미국 군인들, 관광객들, 거리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들 등등. 외국인 유학생들의 상당수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한국 스타일’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결혼 이주여성들은 한국의 실체를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었으며, 외국인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모국과 한국을 부지런히 연결하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은 체류 중인 국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지역민 대상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가고 있었으며, 거리의 음악가는 연주를 하고 돈을 받았다. 해운대와 같은 유명 관광지 말고도 외국인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작금의 외국인들은 부산에서 넓고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해 주니 고맙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부산에서 행복하게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행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고, 또한 누군가의 여행을 돕는 자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여행 경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험도 있을 것이다. 유행처럼 한때 반짝하고 사라지는 여행지도 있을 것이다. 기를 쓰고 홀로 부유하는 여행자도 있을 것이고, 여행이 삶의 유일한 보상이자 사치인 자도 있을 것이다. 천하를 떠돌고도 외로운 이는 계속 외로울 것이고, 어떤 이는 3박 4일 패키지 투어만으로도 충만할 것이다. 굳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시절이다. 이것이 여행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부산이라는 장소적 경험을 하는 중이다. 당신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 하필이면 왜 부산인가?, 막상 와보니 부산은 어떤 곳이던가? 등등의 질문 충동을 느끼곤 한다. 딱 한 번 실제로 물은 적이 있는데, 부산에 살고 있는 몽골 출신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부산이 사람 살기에 정말 좋은 도시라고 했다. 인프라와 공산품 품질이 최고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외형이 얼마나 한국 사람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여행은 피곤한 일이다. 잠시 잠깐 일지라도 집을 떠나는 일은 사건이다. 집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여행 가방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아무리 값비싼 숙소도 내 집만 하겠는가. 하지만 인생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만을 챙기는 일을 이때가 아니면 언제 연습해 보겠는가. 심지어, 여행에서 챙겨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물건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힘들게 캐리어를 끌거나, 백팩을 메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볼 때면 이렇게 읊조리곤 한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피곤하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필수 코스 다 안 가봐도 되잖아요.” 여행은 경험하는 것이다. 고행하는 것이 아니라. 요즈음 이렇게 많은 외국인 속에서, 나의 도시 부산을 새롭게 보게 된다. 나고 자란 나의 도시는, 이제 더 이상 나만의 도시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나의 도시를 사랑하게 될 줄이야. 부산은 그 자체로 이제 세계가 되었다. 이미 부산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환영의 인사를, 아직 부산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초대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앉아서 세계 속으로’를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