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절실함: 블루투스 시대에 되새겨 보는 인간의 인간다움
윤혜준_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귀에 블루투스 수신 장치를 꽂지 않으면 집밖에 나서지 않는다. 귀를 그렇게 막고 눈을 핸드폰에 고정하고 나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정서적 안정을 취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과 밀착해 있어야 하는 출퇴근 대중교통 공간 속에서나, 일이 없거나 일을 쉬며 커피숍에 앉아 있을 때나, 나의 나다움을 지키려면 귀부터 일단 막고 볼 일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나는 말소리나 음악 덕분에 나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내가 듣고 싶은, 또는 내가 듣고 싶다고 믿고 있는, 음악이나 수다 방송을 듣거나, 동영상을 보면 그나마 삶의 무료함과 갑갑함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는 이들이 우리 시대에는 정말 많다.
나는 듣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 정보, 뉴스 해설을 들려주는 유튜브 채널들의 목록은 각자의 성향과 욕망을 말해주는 지표다. 구글 수퍼컴퓨터의 알고리즘은 개인의 그러한 정체성을 파악하고 분류하고 강화한다.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자기가 구독한 채널들이 ‘진실’이라고 단언하는 서사만 수용한다. 그러한 서사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정보나 사실들은 모조리 가짜 뉴스로 치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 이념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념이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상당한 심리적 이득을 가져다준다. 자신이 생업을 위해 하는 일이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실천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키거나 지켜내는 주역이라는 착각을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뜻의 영어 단어는 크게 두 가지, ‘hear’와 ‘listen’이 있다. 전자가 수동적이며 반사적인 생리작용에 근접한 뜻이라면, 후자는 의지적이고 이성적인 ‘경청’에 가깝다. 많은 한국인이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며 듣기 평가 시험에서 수없이 들었을 ‘listen carefully’가 이 두 번째 동사의 전형적 용례 중 하나다. 첫 번째 동사는 소음 등 기타 이유로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쓰는 ‘I can’t hear you’가 전형적인 쓰임새이다. 영어 외의 다른 유럽 언어들도 ‘듣기’를 뜻하는 동사들을 별개로 사용하며 이와 같은 수동-능동, 생리-인지의 차이를 반영한다. 프랑스어의 ‘entendre’와 ‘écouter’의 차이, 이탈리아어의 ‘sentire’와 ‘ascoltare’는 뉘앙스는 다소 다르지만 대체로 영어의 ‘hear’와 ‘listen’의 차이와 유사하다. 영어와 족보가 가장 가까운 유럽어인 독일어의 경우, ‘hear’는 ‘hören’이, ‘listen’의 역할은 ‘hören’ 앞에 접두사를 붙여 ‘zuhören’이나 ‘anhören’이 맡는다.
토머스 로런스(Thomas Lawrence, 1769-1830),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호메로스」
영어에서 ‘듣기’의 의미 군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특별한 뜻을 부여받은 말이 하나 있다. 이 동사는 ‘heed’로, 주의를 기울여 들을 뿐 아니라 뭔가 들으며 교훈이나 행동 방침을 거기에서 얻고 따르는 행위를 뜻한다. 전형적 용례를 꼽자면 ‘heed someone’s call/advice/warning(누가 해주는 요청/충고/경고를 듣고 실천하다)’이다. 단지 듣기만 하고 흘려버리는 것은 ‘heed’가 아니다. 어원이 같은 독일어 ‘hüten’은 ‘주의하다, 경계하다’는 뜻만 갖고 있지 귀로 듣는다는 뜻은 없다. 라틴 계열 유럽어로 이 단어를 번역하려면 몇 개 단어가 합쳐진 동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프랑스어의 경우 ‘heed’는 ‘tenir compte de’이고, 이탈리아어로는 ‘tenere conto di’나 그냥 ‘ascoltare’이다.
영어의 ‘heed’가 갖고 있는 묘한 매력이 영어가 딱히 다른 유럽어들보다 더 우수하거나 의미가 풍부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다만 그 말을 통해 우리가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추억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전자매체가 사람 말소리를 들려주는 시대가 오기 한참 전에 먼저 인쇄매체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이전까지는 글을 적고 보관하는 것이 수고스럽고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기에 인류는 음성으로 말하면 귀로 듣고 암기하는 역량으로 문명을 만들고 유지했다. 오늘날까지 수 천 년 된 경전을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들어라! 이스라엘아!(Shema Israel)”로 시작하는 계명을 듣고 또 들으며 마음속에 새겨왔다. 또한 그렇게 듣는 말이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로 믿었기에 그냥 들을 뿐 아니라 그대로 실천해야 함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나 『일리아드』 등의 자신의 서사시를 파피루스에 직접 기록한 바 없다. 그는 곡조와 박자에 맞춘 운문으로 이 긴 작품들을 노래했다.
게라드 반 혼토르스트(Gerard van Honthorst, 1592-1656), 「다윗 왕, 이스라엘의 왕」
인쇄매체 시대에도 말소리는 듣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인류가 늘 갖고 있었다. 시인들은 운율과 장단을 통해 언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와 기법들을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아 사용해 왔다(유럽 언어들의 시들에 배어 있는 음악성은 필자의 『인생길 중간에 거니는 시의 숲』의 원문, 번역, 해설을 참조하시길). 언어 예술을 귀로 감상할 때는 ‘heed’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heed’에 준하는 집중력이 요구된다. 또한 그것을 눈으로만 읽지 않고 낭독하는 음성으로 직접 귀로 들을 때 받는 느낌은 다르다. 죽은 옛 시인이 호소하는 말들에는 뭔가 내가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충고와 경고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것까지 깨닫는 절실한 듣기는 ‘heed’의 영역에 근접한다. 편견을 신념으로 고착시키는 유튜브 채널의 지껄임이 줄 수 없는 힘과 권위, 위로와 도움을 그러한 듣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절실한 듣기는 숱한 예가 있겠으나, 나에게는 양치기, 장군, 군왕이자 시인 겸 ‘송 라이터’인 다윗의 시들이 그러한 ‘heed’의 대상이다. 영어 특유의 울림이 풍족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으로 세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한글 번역은 『새한글성경』). 독자님들이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권한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여호와가 나의 목자, 내게 모자람 없네. (시편 23편 1절)
Purge me with hyssop, and I shall be clean: wash me, and I shall be whiter than snow. 주님이 내 죄를 히솝(우슬초)으로 없애 주시면, 내가 깨끗해지겠습니다. 나를 씻어 주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더 희어질 것입니다. (시편 51편, 7절)
Except the LORD keep the city, the watchman waketh but in vain. 여호와가 도시를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사람이 깨어 있어도 헛일이지요. (시편 127편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