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봄과 마슬레니차
방교영_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노과 교수
작년 4월, 러시아 학문의 요람이라 불리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렀다. 3월 말 모스크바로 향하던 길, 한국의 4월보다 추워 봤자 얼마나 춥겠냐고 가볍게 생각했다. 이미 개나리와 벚꽃이 지고, 봄기운이 완연할 때였으니까. 그렇게 가벼운 옷차림과 설레는 마음으로 모스크바에 내렸다. 그러나 모스크바 날씨는 나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내가 마주한 것은 살을 에듯 차가운 칼바람과,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하늘이었다. 모스크바의 봄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도시는 여전히 두꺼운 설경에 뒤덮여 있었고, 사람들은 두툼한 샤프카(러시아 전통 털모자)와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봄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모스크바의 겨울은 그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강의동으로 이어지는 교정 산책로에는 수많은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4월 초순의 어느 날, 여전히 영하의 기온을 맴도는 날씨 속에서 나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앙상하고 메마른 사과나무 가지 끝에 아주 작고 여린, 그러나 분명한 초록빛을 띤 새순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 나는 한참 동안 그 새순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고,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스스로의 생체 시계에 맞춰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 초록색 점 하나가 주는 울림은 생각보다 컸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생명을 틔워내는 모습에서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경외심을 느꼈다.
모스크바의 자연은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봄을 허락하지 않았다. 4월 중순이 되자, 모처럼 돋아난 사과나무 새순 위로 거짓말처럼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 여린 초록빛 새순들이 하얀 눈송이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안타까움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봄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구나.” 봄은 처절할 정도로 간절하게 기다리고, 의심하며, 그럼에도 다시 믿어야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의 승리와 같았다. 봄은 그런 계절이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새순을 보며, 모스크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봄을 갈망하고 축제를 통해 그 기쁨을 표출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곧 삶에 대한 의지이자, 고난을 이겨내는 인내의 다른 이름이었다.
간절한 기다림의 정점이 러시아의 전통 축제인 ‘마슬레니차(Масленица)’가 아닐까 한다. 마슬레니차는 고대 슬라브인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며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던 이교도 축제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대사순절 직전의 한 주간을 즐겁게 보내는 절기로 자리 잡았다. 축제의 이름,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어로 버터를 뜻하는 ‘마슬로(масло)’에서 왔다. 대사순절 기간에는 육류와 유제품 섭취가 금지되기 때문에, 그전에 마음껏 버터와 치즈를 즐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면에는 긴 겨울 동안 억눌렸던 생명력을 발산하고, 곧 다가올 농번기의 풍요를 기원하는 민중의 염원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마슬레니차는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다른 테마로 진행된다. 월요일은 축제를 맞이하는 날로 짚인형을 만들고, 화요일은 젊은 남녀들이 짝을 찾는 유희의 날이다. 수요일은 사위가 장모님이 차려준 음식을 먹는 날이며, 목요일부터는 본격적인 ‘대축제’가 시작되어 썰매 타기, 눈싸움, 민속 공연 등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진다. 특히, 일요일은 ‘용서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데, 사람들은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짚인형 태우기’를 진행한다. 활활 타오르는 짚인형은 지나간 겨울의 고통과 악운을 상징하며, 그 재가 대지에 뿌려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봄이 시작됨을 선언한다.
마슬레니차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은 단연 ‘블리니’이다. 둥글고 노란 블리니는 겨우내 그리워했던 ‘뜨거운 태양’을 형상화한 음식이다. 러시아인들은 갓 구워낸 따끈한 블리니를 먹으며 태양의 기운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믿었다. 버터와 꿀을 듬뿍 발라 달콤하게 먹기도 하고, 붉은 캐비아(이끄라)나 연어를 얹어 고급스럽게 맛보기도 한다. 모스크바 거리 곳곳의 가판대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블리니 향기는 봄의 전령사와 같다. 모스크바 대학교 앞 광장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뜨거운 블리니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몸속까지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모스크바의 혹독한 추위를 함께 이겨낸 공동체의 일원이 된 듯한 소속감을 얻는 일이었다.
작년 4월, 눈 덮인 사과나무의 새순을 보며 느꼈던 경이로움과 마슬레니차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혹독한 추위가 길면 길수록 봄의 따스함은 더욱 소중해지고, 기다림의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모스크바의 봄은 단순히 기온이 올라가는 현상이 아니라, 인내 끝에 삶을 쟁취하는 축제였다.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모스크바의 사과나무 새순과 황금빛 블리니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나누고 싶다. 아무리 눈이 다시 내린들,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며 그 봄은 기다린 만큼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