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dade의 도시 리스보아
이승용_한국외대 포르투갈어과 교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보아(영어 표기로는 리스본) 전설에 따르면 율리시스가 세운 도시로 페니키아어 Olissipo(마법에 걸려 매혹적인 항구, 안전한 항구)라는 말에서 리스보아라는 도시 이름이 유래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리스보아를 7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도시라고 일컫는데 이는 아마도 가톨릭 성격이 강한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수도인 리스보아를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기둥의 도시와 동일시 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페니키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리스보아는 이베리아 반도와 포르투갈의 명암을 함께한 도시기도 하다. 이베리아 반도를 7세기 동안 지배했던 이슬람의 흔적도 남아있고, 벨렝(Belém) 지역에 가면 포르투갈 황금기인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섞여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탑과 같은 건축물과 함께 발견되는 조형물도 만날 수 있다. 해외영토(포르투갈은 식민지를 해외영토라고 했었다)와 해상무역 거점들로부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상품들이 처음으로 하역되고 거래되었던 쁘라사 두 꼬메르시우(Praça do Comércio, 상업광장)의 크기와 인접 거리는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해상 패권국으로서의 당시 포르투갈이 얼마나 대단한 위용을 떨쳤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
그러나 리스보아에는 이런 밝은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항해시대의 화려함 뒤에는 먼 바다로 항해를 나선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리움에 사무친 사람들, 먼 바다로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아올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없이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함,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비통함에 슬픔을 달래는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움은 비단 남아있던 사람들의 몫만은 아니었고 포르투갈을 떠난 선원들과 해외영토에 나가 있던 개척민들 또한 고국과 고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이런 감정이 모이고 모여 포르투갈의 아주 독특한 국민 정서인 ‘사우다드(saudade)’가 태어난다. 사우다드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움’, ‘회상’, ‘향수’, ‘동경’ 등인데 포르투갈 사람들의 정서를 이야기할 때는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보통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의 빈자리에 대한 원망과 애증이 섞여 있는 포르투갈의 국민 정서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대항해시대 원양 함대가 들고 나던 항구였던 리스보아는 포르투갈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이 사우다드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 파두(Fado)는 사우다드라는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파두는 리스보아 파두와 꼬임브라 파두로 나뉘는데 대학도시 꼬임브라에서 불리는 파두가 젊은 대학생들의 연애와 사랑 등 낭만과 경쾌한 분위기라면, 리스보아 파두는 그리움, 애잔함, 어쩔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사우다드의 정서를 가득 담고 있어 무거운 느낌이 있다.
쁘라사 두 꼬메르시우(Praça do Comércio)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리스보아 대지진이라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사라져 버린 영광의 시절, 좋은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하게 된다. 1755년 11월 1일 발생한 지진으로 리스보아 전체의 약 85%가 파괴되고 도시는 폐허로 변한다. 이 지진은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포르투갈의 위대함을 보여주던 역사적 건물들을 모두 사라지게 했다. 현재 리스보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대지진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이다. 리스보아에서 대지진 이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주로 리스보아를 둘러싸고 있는 7개의 언덕 위다. 대항해시대 영광을 간직한 벨렝(Belém) 지역에 가면 벨렝 탑(Torre de Belém)이라는 요새가 강 중심이 아니라 강변에 붙어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왜 그곳에 있는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 요새도 원래는 항구에서 바다로 드나드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강 중심에 세워져 있었으나 대지진이 일으킨 지형 변화로 인해 마치 강변에 붙여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지진으로 인해 리스보아가 단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것을 넘어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도 상징적으로 단절되게 되었다. 뽕발 후작(Marquês de Pombal, 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이라는 걸출한 재상이 도시 재건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팽창주의 정책을 펼쳤지만,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은 포르투갈 왕실 자체가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브라질로 옮겨 감으로 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다. 포르투갈의 황금기는 1490년부터 1540년까지 60여 년 정도로 사실 그리 길지 않다. 17세기 포르투갈은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 세운 해외영토를 양분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을 뿐이다.
벨렝 탑(Torre de Belém)
대항해시대의 유물인 사우다드는 1580년 스페인에 합병된 뒤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영광스러운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특히 1755년 대지진과 1807년 나폴레옹 침공을 겪으며 그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던 것 같다. 20세기 들어와서는 살라자르 독재 정부하에서 포르투갈을 떠나 유럽 곳곳에 퍼져 살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사우다드는 다시 한번 더 포르투갈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대항해시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아쉬움,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등이 어우러진 사우다드는 포르투갈의 힘이 약해지면서 점차 그 대상이 과거이거나 사라져 버린 영광 등으로 바뀐 것 같다. 그리움과 상실감이 절망감이나 무기력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과 복원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우다드라는 마법에 걸린 도시 리스보아, 그리고 포르투갈이 어떤 방향으로 그 마법을 풀어낼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