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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원조 왕인 박사

김종덕_한국외대 일본언어문화학부 명예교수

일본의 시인 오오카 마코토는 40여 년 전 도쿄대학의 강의에서, “문화 수출이 안 되면 소니, 도요타의 수출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하며, 문화교류와 수출의 관계를 역설했다. 오래전부터 일본은 국제교류기금을 내세워 외국인에게 일본어 교육과 문화교류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8년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할 때, 저질·불량 문화의 유입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저질 문화 유입보다는 ‘겨울연가’를 비롯한 한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K시리즈로 포장된 문화콘텐츠가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문화수출, 한류의 원조는 언제 누구로부터일까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이전의 선진문물과 인물교류는 거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동류(東流)하는 일방통행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 문헌에는 한반도에서 전해진 문물의 기록이 아주 남아있다. 특히 일본의 도읍이 야마토(大和)와 나라(奈良)에 있었던 시기의 『고지키(712)』나 『니혼쇼키(720)』, 『만요슈(759)』 등에는 신라 향가의 영향을 받아 한자의 음훈을 이용한 만요가나(萬葉假名)로 기술된 4,700수 정도의 고대 가요가 전해진다. 이들 문헌에 등장하는 ‘한(韓)’, ‘가라(加羅)’, ‘한국(韓國)’, ‘고려(高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의 국명은 대체로 선진문물을 상징한다. 『만요슈』에는, ‘한복(韓衣)을 입고’, ‘한복을 당신에게 입히고 싶어’, ‘한복 같은 다쓰다(竜田)산이 단풍으로 물들었네’, ‘우리 집에 가라(韓) 쪽 풀을 심고’, ‘가라 옥구슬을 손에 감고’, ‘고려 비단 띠를 풀고’, ‘신라 도끼’, ‘가라(韓) 절구’, ‘가라 오비’ 등의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비단이나 비단 띠, 옥구슬 등은 당시의 젊은 남녀가 치장할 때 필수적인 명품 액세서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류의 원조 왕인 박사의 등장
이러한 문물을 전한 인물 중에서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 박사라 생각된다. 『고지키』 중권의 오진(應神, 3세기 말) 왕 대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아직기(阿知吉)를 통해 암수의 말과 칼, 큰 거울[大鏡] 등을 전한다. 이에 오진은 다시 백제국에 “만약 현자가 있으면 보내 주시오.”라고 하자, 백제에서는 다음과 같이 왕인 박사와 여러 장인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와니키시(和迩吉師)가 논어 10권, 천자문 1권, 전부 11권을 함께 전한다. [이 와니키시는 왕인 박사의 일본 이름이고 사관의 조상이다.] 또 대장장이[韓鍛]로 이름은 탁소(卓素)이고, 또 의복(呉服)을 만드는 서소(西素) 두 명을 대동했다. 그리고 하타노 미야코(秦造)의 조상, 아야노 미야코(漢直)의 조상, 술을 빚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름은 니호(仁番)인데,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須須許理) 등이 도래했다. 그래서 이 스스코리가 술을 빚어 왕에게 올렸다. 왕이 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읊었다.

와니키시 즉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갔을 때, 논어와 천자문을 전함과 동시에, 갖가지 선진 기술자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문자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왕인 박사 이전이지만, 공식적인 문자 전래의 역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함께 데리고 간 기술자로는 대장장이, 직공, 양조장인 등이 있었다. 이후 6세기경에는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무대예술 노(能)의 원형이 되는 가면극 기악(伎樂)을 전하기도 한다. 즉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 박사, 탁소, 스스코리, 미마지 등은 모두 일본 문화의 신기원을 이룬 한류의 원조들이라 할 수 있다.

헤이안 시대(794-1192)의 궁녀나 아이들은 어려운 한자로 기술한 만요가나를 초서 화하거나 한자의 일부분으로 가나 문자를 창안한다. 이 시대의 일본에서는 894년에 견당사가 폐지된 이후, 가나 문자로 기술된 와카, 일기, 수필, 모노가타리 등 소위 국풍문학(國風文學)이 화려하게 꽃피운다. 이렇게 가나 문자로 기술된 작품들은 후대의 일본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음은 일본 최초의 칙찬가집 『고킨와카슈(905)』 가나서(仮名序)에는 왕인 박사가 오진의 아들 닌토쿠(仁徳) 왕의 즉위를 축하하여 읊었다는 와카를 기술하고 있다.

‘나니와쓰에 피는구나 이 꽃, 겨울 동안 기다리다 지금 봄이 왔다고 피는구나 이 꽃’

나니와쓰(難波津)는 지금의 오사카(大阪)이고, 이 꽃은 매화로 닌토쿠 왕을 상징한다. 『고킨와카슈』의 서문에는 이 왕인 박사의 와카를 우네메(采女)가 읊은 ‘아사카야마(安積山)’의 노래와 함께 ‘와카의 부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 박사가 한시도 아닌 일본의 전통 와카를 읊어, 와카의 아버지로 칭송받게 되었을까? 그뿐만 아니라 이후 와카를 읊거나 습자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이 노래로 연습하게 된다는 것을 후대의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최고 최장편의 소설 『겐지 이야기』 와카무라사키 권에는, 왕인 박사가 읊은 ‘나니와쓰’의 노래로 붓글씨 연습을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히카루겐지(光源氏)가 학질의 치료를 위해 기타야마(北山)에 갔을 때, 아직 10살인 어린 와카무라사키(若紫)를 엿보고 연애편지를 보내자, 와카무라사키의 조모는 어린 와카무라사키를 대신해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낸다.

“지금은 아직 나니와쓰조차도 만족스럽게 이어 쓰지 못하오니 하릴없는 일이지요.”

헤이안 시대 귀족의 결혼 적령기는 12~15세였는데, 와카무라사키는 아직 나이가 어려 ‘나니와쓰’조차도 연면체로 이어 쓰지 못해 히카루겐지의 연애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습자와 와카, 음악을 익히는 것이 필수 교양이었는데, 와카무라사키의 조모는 ‘나니와쓰’를 이어 쓸 수 있는 것을 성인의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왕인 박사가 읊은 ‘나니와쓰’의 와카는 한류의 원조가 되었고, 후대 일본 문학의 미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히카루겐지가 기타야마에서 도읍으로 돌아갈 때, 승도(僧都)는 옛날 성덕태자가 백제로부터 입수한 금강자의 염주를 백제풍의 세련된 상자에 넣어 선물한다. 이 대목에서 승도가 백제로부터 건너온 염주와 상자 등의 물품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 제33 「색복(色服)」에는 신라의 1등급에서 5등급까지의 관복이 보라색이었고, 고구려 귀족의 모자도 보라색이며, 백제왕도 보라색 겉옷[紫色袍]을 입었다고 되어있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에서도 1위에서 3위까지의 관리들이 모두 보라색의 관복을 입었다. 즉 한반도와 일본의 고위 귀족들이 모두 보라색 옷과 모자를 착용할 정도로 보라색은 고귀한 색이었다. 『겐지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 와카무라사키라는 이름에서 무라사키는 보라색을 의미하고, 히카루겐지는 일생 보라색과 연고가 있는 여성을 이상적인 연인으로 추구한다. 얼마 전 BTS 데뷔 1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것을 상기하면서, 한류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다고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