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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기 와 있는 아프리카 — 언어와 문화가 한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 사이의 다리가 될 때

허성용_(사)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언어는 단지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낯선 사회 안에서 자신을 설명하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하는 기본 조건이다. 해외에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대충은 알겠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던 순간, 기차역 안내 방송을 놓치고도 무엇을 놓쳤는지 몰라 불안했던 순간, 번역 앱을 켜고도 이 말이 정말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걱정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여행 중이라면 그런 막막함은 잠깐의 불편으로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매일의 생활이 된다.

병원에서 증상을 설명해야 할 때, 관공서에서 서류를 이해해야 할 때, 학교와 일터에서 자신의 상황을 말해야 할 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안전과 권리의 문제가 된다. 번역 앱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단어가 옮겨지는 것과 맥락이 이해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언어는 문장을 바꾸는 일인 동시에,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이미 여기 와 있는 아프리카」라는 시민사회 정책 제안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정상회의, 개발 협력, 무역, 핵심 광물 같은 큰 단어들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 간 관계가 오래 지속되려면 제도와 계약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시민, 언어와 문화를 건너는 사람들, 일상에서 관계를 이어 가는 공동체가 함께 자라야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 한국에는 이미 아프리카에서 온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다. 유학생, 직장인, 예술가, 사업가 등 그 수가 약 2만 2천 명에 이른다. 고향을 떠나 다른 땅에 뿌리 내린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한국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는 한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일상에서 잇는 가장 가까운 연결고리다.

이 연결고리가 왜 중요한지는 두 조사 결과를 나란히 놓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외교부 정책연구로 진행된 2023년 국내 조사에서 한국인의 절반 이상은 아프리카를 “잘 모른다”고 답했다. 반면 이듬해 아프리카 6개국 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열에 아홉 안팎이 한국에 호감을 보였다. 정부의 원조 때문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와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K-콘텐츠 덕분이었다. 한국은 아직 아프리카를 잘 모르지만, 조사에 참여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한국을 가까이 느끼고 있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정보가 부족해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문제는 호감의 크기가 아니라 만남의 구조다. 서로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도, 실제로 만나고 관계를 이어 갈 길이 부족하면 그 마음은 오래가기 어렵다. 이 거리를 가장 자연스럽게 좁힐 수 있는 사람들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그런데 이 연결고리는 곳곳에서 막혀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비자 문제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회화지도(E-2) 비자의 대상 국가 가운데 아프리카 국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단 한 곳뿐이다. 케냐, 나이지리아, 가나, 우간다처럼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영어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실력이 뛰어나도 그 명단에 없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우리 곁에 있는데, 제도는 아직 그들을 ‘언어의 주체’로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가 사람을 잇는 통로가 아니라, 배제의 기준이 된 셈이다.

이번 제안서에 공동제안 기관으로 함께한 bbb코리아의 의견도 바로 이 지점을 짚고 있다. 언어와 문화의 소통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시민이 사회에 참여하고 서로 신뢰를 쌓는 바탕이다. 병원과 학교, 관공서와 재난 현장에서의 언어 접근성은 한 사람의 안전, 때로는 생명과도 맞닿아 있다. 누군가에게 통역의 다리를 놓는 일은 단지 말을 바꾸어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2024년 첫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이후, 한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의 협력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선언이 있었고, 회의가 열렸고, 협력 의제도 크게 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약속들이 사람들의 만남과 일상의 관계로 이어지도록 받쳐 줄 구조다. 국가 간 관계가 문서 위의 합의로만 남지 않으려면, 그것을 실제 관계로 이어 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발언하는 GHASKA 조이 나나 오코군-오돔폴리 대표(사진. 아프리카인사이트)

지난 10여 년간 이 고민을 이어 온 아프리카인사이트는 최근 시민사회와 함께 「이미 여기 와 있는 아프리카」 정책 제안서를 외교부에 전달했다. 6월 1일 서울에서 열린 2026 한·아프리카 외교장관회의를 앞둔 때였다. 아프리카인사이트가 대표로 제안하고, bbb코리아를 비롯한 31개 기관·단체와 76명의 개인이 공동 제안자로 뜻을 모았다. 요청은 무리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사람과 활동이 일회성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세 가지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첫째, 이웃을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잇는 사람’으로 보는 자리다.

앞서 말한 비자 기준을 현실에 맞게 다시 살펴보고, 아프리카에서 온 이들이 세계 시민교육 강사로, 문화 행사 기획자로, 청소년 멘토로 설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두 문화를 동시에 살아 내는 사람들을 정책의 가장자리에 두는 것은 가장 가까운 연결고리를 활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째, 정부와 시민사회가 정기적으로 마주 앉는 자리다.

한·아프리카재단 안에 시민사회와 디아스포라가 반년에 한 번씩 모여 정책을 논의하는 공식 테이블을 두자는 제안이다. 시민사회를 행사의 구색을 맞추는 손님으로 부르는 것과, 정책을 함께 짚어 가는 파트너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관계를 지속하려면 의견을 듣는 절차가 아니라 함께 논의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한 해 행사로 끝나지 않는 교류의 터다.

단발성 축제가 아니라, 몇 해 단위로 약속된 안정적인 문화 교류의 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예산을 무리하게 짜내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진 자원들을 잘 엮어 지속 가능한 구조로 세우자는 뜻이다. 반복해서 만나고, 함께 준비하며, 서로의 변화를 확인할 때 비로소 관계의 기반이 만들어진다.

이 세 가지 제안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은 “선언을 구조로”다. 아무리 좋은 약속도 받쳐 줄 제도와 플랫폼이 없으면 오래 남기 어렵다. 정상회의와 장관회의의 언어가 시민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정책 문서가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그것을 담아낼 구조가 필요하다.

정책제안서 전달 및 기념촬영(사진. 외교부)

이 제안서는 아프리카를 더 멀리서 바라보자는 문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자는 제안이다. 회의장의 외교와 거리의 만남, 정책 문서와 통역 현장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한 사회가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만남에서 먼저 바뀐다. 누군가의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그 사람이 이 사회에서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한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아프리카의 목소리를 듣고, 잇고, 함께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은 관계를 오래 이어 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미 여기 와 있는 아프리카를 만난다는 것은, 멀리 있는 대륙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 곁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지닌 언어와 문화와 경험을 함께 말하게 하는 일이다. 그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낯선 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태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