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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쿠바 문화

이강선_호남대 교양학부 교수

헤밍웨이(1899∼1961)의 중편 소설 『노인과 바다』는 주인공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엄청나게 큰 청새치를 잡았다가 상어에게 빼앗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적 사유로 인해 다양한 비평과 해석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나온 번역서만 해도 530 여권에 이르니 오죽할까. 관심 있는 사람, 관련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 속에서 쿠바에 관한 정보를 여기저기서 만날 것이다. 쿠바가 위치한 지정학적 정보, 쿠바 사람들, 쿠바의 역사, 쿠바의 종교, 당대 쿠바인의 주거환경, 쿠바의 음식 등이다. 물론 쿠바를 배경으로 하므로 이러한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담길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쿠바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휘요, 표현이요, 맥락이다. 모든 언어의 어휘는 그 언어 문화권에서 중요한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쿠바인들에게 ‘파파’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파파라면 아버지라는 의미인데 아버지는 전통의 상징이요, 가족을 책임지는 존재다. 그만큼 헤밍웨이가 쿠바를 잘 알고 있고 사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가 처음 쿠바를 방문한 것은 1928년으로, 1932년에는 친구와 함께 방문했으며, 1940년에는 집을 구입했다. 이 집에서 20년을 산 그는 쿠바 혁명 직후인 196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거의 30여 년간 들락날락하면서 쿠바에서 살았으니 6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의 절반을 쿠바에서 보낸 것이다.

이처럼 쿠바에 오래 살았던 만큼 『노인과 바다』는 길지 않은 작품임에도 쿠바에 대한 지식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우선 쿠바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임을 알려주는 각종 정보가 등장한다. 한편으로 쿠바 역사에 대한 정보도 나오고, 쿠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정보도 등장한다. 바다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고 쿠바의 문화와 연관된 표현을 찾아보면 쿠바인의 종교, 역사, 그리고 음식이 언급되어 있다.

언급되는 음식은 노란 밥, 검정콩 쌀밥, 바나나튀김, 스튜, 또한 각종 물고기가 있지만 산티아고가 직접 섭취하는 음식을 살펴본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음식은 ‘노란 밥’으로 산티아고와 마놀린의 대화에서 나온다. 첫 장면에서 산티아고는 바다에서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가 물고기를 잡지 못한 지 84일이 흘렀다. 항구에서 그를 맞는 마놀린은 5살 때부터 산티아고로부터 고기잡이를 배웠다. 마놀린이 산티아고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묻자, 산티아고는 ‘생선을 곁들인 노란 밥 한 냄비(A pot of yellow rice with fish)’가 있다고 대답한다. 노란 밥은 사프란이나 강황으로 물들인 밥이다. 스페인의 유명한 명물 요리인 빠에야는 노란색으로 사프란이 빠지면 안 되는 음식이다. 해물 빠에야는 다양한 해물과 쌀로 만든 음식으로 생선을 곁들인 노란 밥 한 냄비는 빠에야 한 냄비다. 쿠바는 스페인의 지배를 400년간 받았으므로 노란 밥은 스페인의 영향이다.

노란 밥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이는 단순히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실제로 먹는 저녁은 레스토랑 주인인 마틴이 준 ‘검정콩 쌀밥(black bean and rice)’이다. 쿠바의 대표적 음식인 ‘검정콩 쌀밥’은 흰 쌀에 검정콩을 넣어 양념한 것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검정콩 쌀밥 요리는 스페인어로 쁠라티요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노스(Platillo Moros y Cristianos)가된다. 모로스는 검은콩으로 어두운색 피부를 지닌 아프리카계 무슬림 무어인을 가리키고, 크리스티아노스는 흰 쌀로 흰 피부를 지닌 스페인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검은콩이 섞인 쌀밥은 이 두 종교 및 인종이 오래도록 반목해오다가 이베리아반도에서 화해한 사건, 레콩키스타를 상징한다.

레스토랑 주인 마틴은 사려 깊게 검정 콩밥과 바나나튀김 이외에도 병맥주를 두 병 보낸다. 이 맥주의 이름은 아투에이(Hatuey)로, 당시 쿠바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던 쿠바산 병맥주다. 이 맥주는 쿠바 원주민 타이노족의 추장이자 스페인 저항 운동을 이끈 국민 영웅, 아투에이(1512년 2월 사망)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늘날 그는 쿠바 최초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으므로 맥주를 마시는 이들은 매번 그를 기억하게 된다.

또한 노인의 집 안에는 코브레 성모상 채색화(the Virgin of Cobre)가 걸려 있다. 이 성모는 자비의 성모로, 그림에는 두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청년(로드리고와 후안 데 호요스)과 한 명의 아프리카 흑인 소년 노예(후안 모레노)가 묘사되어 있다. 1612년, 이들은 소금을 모으러 작은 만에 들어갔고 돌아오다가 산티아고 델 프라도(Santiago del Prado: 오늘날 엘 코브레)에서 폭풍우에 휩쓸렷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들은 성모마리아에게 기도했다. 그때 그들 앞에 성모가 나타났다. 이들은 무사히 돌아왔고 자신들이 살아난 것이 성모 덕분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쿠바의 성모이자 쿠바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엘 코브레의 성모가 태어난 것이다. 이 성모는 어두운 피부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이 어휘들은 어휘 자체로, 혹은 맥락으로 쿠바와 스페인어권의 문화를 반영한다. 코브레 성모와 아투에이 맥주가 쿠바만의 종교와 역사를 말해준다면, 검정 콩밥과 생선을 곁들인 노란 쌀밥은 스페인어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삶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 주제가 쿠바라는 환경에서 적절하게 배치되었으므로 더 큰 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